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싸움 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화려한 무대 장치 없이 오직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쌓아 올리는 치열한 대화의 향연이 있다.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몰아치는 대화 속에서 두 부부가 벌이는 격렬한 ‘말의 공방’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 ‘대학살의 신’ 공연 사진(신시컴퍼니 제공)
11살 두 소년 브뤼노와 페르디낭이 놀이터에서 싸우다 페르니당에게 맞은 브뤼노의 앞니 두 개가 부러진다. 브뤼노의 부모 미셀과 베르니끄는 페르디낭의 부모 알랭과 아네뜨를 집으로 초대해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논하려 한다. 자녀들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모인 두 부부는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중산층 가정의 부부의 만남은 고상하고 예의 바르게 시작되었지만, 대화를 거듭할수록 유치찬란한 설전으로 변질되고 급기야 삿대질, 물건 던지기, 욕지거리, 눈물이 뒤섞인 거친 육탄전으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들의 설전은 가해 아동 부부와 피해 아동 부부의 대립에서 엉뚱하게도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눈물 섞인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다. 한마디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 것이다.
두 부부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한 편의 시트콤을 보듯 폭소와 함께 바라보던 관객들은 어느덧 자기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민낯 그리고 교양이라는 가면 속에 가려져 있었던 인간 근본의 가식, 위선, 유치, 치사, 허상을 말이다.
↑ ‘대학살의 신’ 공연 사진(신시컴퍼니 제공)
1994년 첫선을 보인 연극 ‘아트’는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의 작가가 바로 야스미나 레자이다. 프랑스인 작가는 지식인의 허상을 유쾌하고 통렬하게 꼬집는 ‘촌철살인의 정수’로 유명하다. 1987년 데뷔작 ‘장례식 후의 대화’로 프랑스 몰리에르상을 받았고 프랑스어권 작가 중 처음으로 토니상을 수상했다. ‘대학살의 신’은 작가의 2008년 작품이다.
이 작품은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연출상, 여우주연상, 올리비에 어워즈 최우수 코미디상 등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의 상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0년 국내 초연된 연극은 연극제 주요 부문상을 휩쓸며 그해 화제작이 되었다. 이번이 5번째 시즌이다. 극은 지식인의 모습 혹은 고상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시니컬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하지만 코믹하게 풀어낸다.
↑ 연극 ‘대학살의 신’ 포스터(사진 신시컴퍼니)
Info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기간: ~2025년 1월 5일
출연: 미셀 – 김상경, 이희준 / 베로니끄 – 신동미, 정연 / 알랭 – 민영기, 조영규 / 아네뜨 – 임강희
[글 김은정(칼럼니스트) 사진 신시컴퍼니]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0호(24.12.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