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자전거 라이딩 여행 3편]
최고도 최악도 아닌, ‘영원히 기억될’ 라이딩의 모든 순간
홋카이도 복부에서 남부, 와카나이~하코다테
800km의 여정…페달을 밟고 계속 나아가다
눈과 맥주, 녹음의 도시 삿포로에서 닷새간의 달콤한 휴식을 보내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 후반전이 시작된 첫날, 위기를 맞고 말았다. 야영을 다시 시작한 첫날밤, 텐트를 친 곳이 하필이면 최근 곰의 출현이 있었다는 마을의 캠핑장이었던 것. 위험이 도사리는 235번 국도를 달리며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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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235번 기나긴 국도 끝자락에서 마침내 샛길을 발견했다. |
삿포로로 향하는 라이딩…길은 어디에나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부산에서 동해안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자전거 국토종주를 한 게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하루 종일, 장시간 자전거를 타는 일상은 그때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생애 첫 해외 자전거 여행이다. 삿포로로 향하는 도로, 차량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번잡한 국도에서 용케 샛길을 찾아 한숨 돌리고 나자 불현듯 한국의 자전거길이 생각났다. 오직 자전거만 통행 가능한 도로가 있다는 것은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이 사실을 십 년 전에 알았더라면 국토종주에서 자전거 타기가 한층 수월했을까? 매 순간 후회 없이 자전거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까. 샛길로 들어서고 보니 자전거길이 따로 없다. 길의 주인은 온통 내 차지다. 도시가 지척이라는 사실은 차량들로 번잡한 도로사정과 더불어 여러 길이 한데 얽히고설킨 지도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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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 도심을 알리는 안내판. 목적지에 도착했다. |
275번 국도를 포함해 여러 개의 국도를 잇는 짧고 긴 샛길이 촘촘하게 도시의 환경을 이룬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현 상황에서 어느 길이 나에게 필요한지, 적합한지 찾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을 찾았다면 뒤돌아보지 말고 그 길을 믿고 그대로 직진하면 된다. 혹여 지름길이 아니더라도, 자칫 선택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결과는 하나다. 길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 길은 결코 선택의 옳고 그름이 아닌 이유와 목적을 실현시켜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우연한 발견들이 페달을 밟는 두 발에 즐거움을 더한다. 지나가다 발견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부리며 도시로의 이동을 잠시 잊었다. 샛길에는 속도 대신 낭만이 있다는 사실을 오감으로 느낀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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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 최대도시인 삿포로 도심 전경, 환한 조명 불빛, 화려한 네온사인이 뒤섞인 삿포로 도심 풍경 |
도시는 도시다. 일몰 직전 삿포로 도심에 도착하고 난 뒤 한참이 지나도록 칠흑 같은 밤은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실 만큼의 환한 조명 불빛, 화려한 컬러와 장식이 눈에 띄는 네온사인이 어지러이 뒤섞여 도시의 길을 밝힌다. 그제서야 지나온 라이딩의 순간과 경험에도 환한 불이 켜졌다. 홋카이도 최북단 소야곶에서 출발해 약 400km의 라이딩을 완수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이로써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의 전반전이 끝났다.
눈과 맥주, 녹음의 도시 삿포로
자다가 자연스레 눈을 떠보니 침대 주변은 아직 깜깜한 밤이다. 시계를 보니 일출시간이다. 창문이 커튼으로 단단히 가려져 한밤중이라 착각한 모양이다. 몸이 기억하는 다음 순서로는 곧장 침낭과 매트리스, 텐트를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것이 겠지만 삿포로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침대에서 잠을 청한 건 8일 만이다. 숫자가 뜻하는 거창한 의미보다 기상 직후 텐트 등의 짐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호사로 느껴졌다. 휴일이라고 해도 자전거 타기를 멈출 수 없는 신세다. 홋카이도 최대 도시인 삿포로의 도심과 근교를 탐험하는 데 있어서 자전거만큼 훌륭한 교통수단도 없다.
삿포로 하면 ‘눈’과 ‘맥주’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눈의 도시이자 맥주의 도시다. 매년 10월 하순경 첫눈이 내린 뒤 이듬해 봄의 해빙 때까지 눈이 녹지 않는 데다 강설량도 많아서 연평균 약 500㎝의 적설량이 관측된다. 삿포로에는 1년 평균 143.5일 동안 눈이 내린다. 홋카이도 총인구는 약 500만 명으로 이 중 40%에 해당하는 약 200만 명이 삿포로에 거주한다. 삿포로의 인구 수는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데 강설지역에 200만 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가 존재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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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 양조장에서 설립 초창기 사용된 맥주통 |
1876년 설립된 삿포로맥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브랜드다. 일본 최초의 독일식 양조장을 설립한 세이베이 나카가와(Seibei Nakagawa)에 의해 맥주 생산이 이뤄졌다. 투철한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세이베이 나카가와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일본을 떠나 독일로 여행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배운 양조기술을 바탕으로 귀국 후 삿포로의 첫 양조장 주인이 되었다. 삿포로맥주는 100% 맥아로 제조하기 때문에 달고 진한 맛이 특징이다. 삿포로를 포함해 일본 전역에 5개의 삿포로 맥주양조장이 위치해 있다. 맥주의 도시답게 삿포로맥주 박물관은 도시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꼽히며, 박물관 내부에는 삿포로맥주의 역사부터 원료, 제조 공정, 패키지 디자인 변천사 등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정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곳은 일본에서 유일한 맥주 박물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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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는 산림이 많은 도시다, 옛 맥주공장을 쇼핑몰로 개조한 삿포로 팩토리 전경, 삿포로맥주 박물관 전경 |
삿포로의 또 다른 특징은 일본의 여러 대도시 환경과 달리 도시 전체가 녹음으로 가득 차 울창하고 광대한 산림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오도리 공원과 마루야마 공원은 최고의 녹지로 손꼽히는 장소 중 하나로 공원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도시가 나뉜다. 오도리 공원은 매년 2월 삿포로 눈축제가 열리는 장소기도 하다. 마루야마 공원에 인접한 홋카이도 신궁은 주변 경관이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삿포로의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봄에는 약 1,400그루의 벚꽃과 약 250그루의 매화가 동시에 개화해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기 때문. 1869년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홋카이도 개척과 발전의 수호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홋카이도 신궁. 이곳은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서 홋카이도는 물론 일본 전역에서 많은 참배자가 찾는 명소다.
닷새 만에 다시 페달을 밟았다. 동부해안도로로
급변하는 날씨 탓에 삿포로에서의 일정이 계획보다 며칠 더 이어졌다. 하루는 종일 비가 내리더니 다음날 초겨울의 기온을 나타냈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전거는 둘째치고 야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상기후 현상은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기온을 다시 하루아침에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며칠간의 기다림 끝에 다시 짐을 쌌다. 호텔을 떠나는 아침, 그래 봤자 닷새간 묵었을 뿐인데 마치 오랜 집을 떠나는 기분이다. 포근한 침대와 힘겨운 작별을 고하고 다시 길바닥생활로 돌아가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아쉬움과 설렘, 질문과 답이 내 안에 뒤섞여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다 도달한 결말은 ‘이유 없음’, 그냥 간다. 그냥 페달을 밟다 보면 불확실한 이유는 어느 순간 확실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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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청한 날씨와 함께 시작된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 후반전 첫날 |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 후반전이 시작된 첫날. 일단 삿포로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간다.
삿포로에서 동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도마코마이에 닿은 뒤 동부해안도로로 따라 최종목적지인 하코다테까지 갈 예정이다. 자전거 여행 초반, 왓카나이에서 서부해안도로를 따라 라이딩을 했던 것과 반대로 이번에는 동부해안도로를 탄다. 사실 지도 앱이 안내한 최적의 라이딩 경로는 삿포로에서 도야호까지 내륙으로 뻗어 있는 230번 국도를 따라가는 것. 한데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번이고 통과해야 하는 데다 해발이 높아 야영을 하기에는 밤 추위가 걱정된다.
그리하여 지름길 대신 동부해안도로를 택했다. 또한 동부해안도로에서 멀지 않은 온천 마을 노보리베쓰에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선택에 힘을 실었다. 첫날 계획한 도마코마이까지의 라이딩은 약 20km를 남겨둔 지점인 우에나에 마을에서 멈춰야 했다. 닷새 만에 50km가량을 달리고 나니 체력적으로 한계가 찾아왔다. 마을에는 무료로 운영되는 캠핑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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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을 맞닥뜨릴 뻔(?)한 후반전 첫날밤의 야영,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일몰의 순간 |
홋카이도 대다수의 무료 캠핑장에는 시설만 갖춰져 있을 뿐 운영자가 상주해 있지 않다. 우에나에 캠핑장도 상황은 마찬가지. 입구에 놓여진 간판과 시설 혹은, 이미 텐트를 쳐놓은 여행자의 흔적이 있다면 판단은 더욱 용이해진다. 잔디밭 한편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오토바이 여행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선 재빨리 텐트를 꺼내 집을 짓는다. 뒤이어 저녁까지 해치우고 나자 금세 해는 저물어 취침시간임을 몸이 먼저 알아챈다.
얼마 안 가 잘 준비를 마쳤을 때 난데없이 차량 한 대가 캠핑장 입구에 멈춰 섰고, 제복을 갖춰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곰의 습격을 따른 위험성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번역기를 이용해 나눈 대화의 요지는 이랬다. 최근 우에나에 마을 인근에 곰이 출현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 “산 중 깊은 숲속이 아닌 이러한 캠핑장에도 언제든 곰이 나타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이들의 말은 당부가 아니라 위협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당장 텐트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 이럴 땐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어쨌든 곰의 출현을 알게 된 이상 곰을 무찌를 계획을 세워야 했다. 취침시간은 물 건너갔고 잠은 이미 다 잤다.
걱정이 태산, 위험이 도사리는 235번 국도
먼저 밝히자면 곰의 출현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결과이긴 하나,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것에 비하면 차라리 곰이라도 만났더라면 평생 써먹을 무용담이라도 생겼을 거란 얼토당토않은 아쉬움도 들었다.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과 야영을 계획하면서 적어도 한번은 곰과 관련된 해프닝이 발생할 거란 예상을 하긴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털 사이트에서 홋카이도 관련 여행정보를 검색하면 ‘곰의 습격’이란 제목의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홋카이도의 겨울이 예년과 달리 따뜻해지고 짧아지면서 야생 곰이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오는 사례가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곰을 실제로 맞닥뜨린 것도 아닌데, 지난밤의 해프닝을 겪고 나니 앞으로 야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잠을 못 잔 것보다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심신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그러했듯 이럴 때일수록 힘차게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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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복4차선 도로, 넘쳐나는 대형트럭, 위험이 도사렸던 235번 국도 |
드디어 동부해안도로를 탄다. 우에나에 캠핑장에서 출발해 약 20km를 달려 동부 해안도시 도마코마이에 닿았고, 이곳에서부터 온천마을로 유명한 노보리베쓰까지 약 50km 구간을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 이날의 계획이다. 여정 초반, 왓카이나이에서 루모이까지 250km가량 서부해안도로를 달렸던 찬란한 기억을 떠올리며 마침내 동부해안도로를 마주했다.
그러나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정 시작 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왕복4차선 도로는 차량 수가 많은 데다 자동차 주행에 따른 엔진이나 배기 소리, 타이어 마찰음 등의 소음이 굉음을 넘어선 수준이다. 게다가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절반 이상은 대형트럭이었다. 도마코마이 페리 터미널이 홋카이도와 본섬을 잇는 주요 선착장으로 이곳에서 빠져 나온 대형트럭이 도로를 장악한 상황이다. 주변에 샛길을 찾을 수도 없는, 오직 플랜A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235번 국도는 위험이 도사리는 최악의 경험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봤을 때 값진 경험이기도 했다. 자전거 여행자를 위협하는 최악의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고개를 겨우 넘으면 또 고개가 나타나는 여정, 그렇기에 페달을 밟는 모든 순간은 최고이자 최악의 경험이다.
※ 홋카이도 자전거 라이딩 여행③ 여정표
☞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 시리즈 기사 보기
일본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①: https://www.mk.co.kr/news/culture/11159731
일본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②: https:
//www.mk.co.kr/news/culture/11168285
[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