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불린 선생님들이 한 명씩 일어섰다. 여기저기에서 조용히 탄식이 터졌다. 그땐 20대, 30대였을 선생님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초로의 노신사, 노숙녀들이었다. 제자의 머리에도 이미 허연 서리가 가득했다. 선생님들의 이름이 불리는 내내 박수는 칸 영화제 커튼콜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고 누군가는 환호성을 질렀다.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나의 슈퍼스타라고.
최근 서인천고등학교 개교 40년을 맞아 열린 동문의 밤 풍경이다. 서인천고는 인천에서 ‘한때의 영광’으로 기억되는 이름이다. 1990년대 한 학년에 50명씩 서울대에 입학시키는 명문이었다. 인천의 각 중학교에서 난다긴다하는 수재들만 입학하는 거의 유일한 ‘비평준화’ 고교였다. 짙은 회색 교복을 입고 동인천역이나 주안역에 내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학생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받던 때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시기는 채 10년이 안 됐다. 1996년 입학생을 마지막으로 학교는 평준화되면서 ‘한때의 영광’은 완전히 사라졌다.
↑ 지난 11월 30일 열린 서인천고 동문의 밤에서 한 선생님이 이제는 중년이 된 과거 자신의 제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선생님들 때문이었다. 수업마다 곡절이 없었을까 마는 서인천고는 헌신하는 교사들로 이름이 나 있다. 임보경 이사장은 말했다. “선생님들은 젊은 시절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으셨다.” 일류대 입학생이 현저히 줄었어도 선생님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자부심 만큼은 어느 학교보다 드높았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사립인 서인천고 교사 가운데는 서인천고 출신이 꽤 된다. 가르치던 제자가 교사가 되면 그 교사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선생님’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실 ‘명문대’ 시절에도 서인천고 학생들은 공부만 하진 않았다. 한 동문의 말이다. “희한했어요. 서울대 갈 만한 친구들은 온종일 책상만 지킬 것 같았는데 안 그랬어요. 그런 친구들일수록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 가서 농구장 뛰어다니고 가을 축제 때 무대에 올라 드럼도 치고, 춤도 췄어요. 그게 그냥 취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지요.”
얄밉고 깍쟁이 같지 않았다. 갈수록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세상이 되고 있다지만 이 학교는 묘하게 그러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1984년 개교 때부터 선생님들은 ‘겸손하고 교양있고 예의바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설립자 故 홍성한 선생 또한 생전에 가장 자주 한 말이었다고 한다. 사실 자연스러운 이치다. 세상과 인간을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말 안 해도 알게 된다.
학교는 현재 인천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은 고등학교다. 해마다 가장 많은 중학생들이 원서를 낸다. 지난해까지 2만475명이 이 학교를 졸업해 사회로 나갔다.
한은경 교장은 법조인, 사업가, 의사들이 그득그득한 동문의 밤 단상에 올라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을 인용했다. 이 단편소설은 형편이 어려운 한 엄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우동집에 가 우동 1인분을 시키면서 시작한다. 엄마는 돈이 없어 그랬다. 그걸 눈치 챈 우동집 주인장은 조용히 2인분을 더 말아 내놨다. 소설은 우동집과 세 모자 사이의 이야기를 훈훈하게 담는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동문들은 삶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나눈 사이입니다. 동문들은 우리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계십니
일류대를 간 학생이나 일류대가 아닌 대학을 간 학생이나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알게 된다.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다고, 성적과 등수가 중요했던 시절은 그 시절대로 그저 아름다웠을 뿐이라고, 인생의 성공은 다른 거라고, 성공은 우리가 살아온 삶 자체였다고.
[ 노승환기자 todif77@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