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B가 오히려 좋았다
위기의 라이딩 순간 나타난 온천
밤새 괴롭힌 바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
라이딩이 차츰 일상이 되고 있다. 길 찾기에만 급급해 여유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심신에 조금씩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의 휴지통과 편의점 실정을 깨우치고, 별 탈 없이 살아가는 삶의 기쁨을 깨달으며, 플랜A에 배신 당해도 곧장 플랜B를 찾는 데 돌입하는 진취적 인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위기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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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나무 숲 아래 안식처가 생겼다. 홋카이도 전역에 자리한 오랜 역사를 가진 세이코마트 편의점, 지역 재철 식재료로 요리한 다채로운 편의점 ‘벤또’(도시락) |
길바닥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지 못한 게 3일째부터 시작된 일이니 벌써 사흘치가 쌓였다. 일본은 길이나 도로에 휴지통이 없다. 어디서나 공중화장실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 화장실 내부에도 휴지통이 없다. 오직 여성용품을 버릴 수 있는 아주 작디작은 휴지통만 있을 뿐. 더욱이 유료 캠핑장에도 휴지통은 없다. 쓰레기는 전부 개인의 몫이다. 사흘치의 쓰레기를 자전거 뒷바퀴 짐칸에 매달고 라이딩을 하는 건 이 모든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많은 쓰레기는 어떻게 생긴 걸까?
우선 일본의 휴지통 실정에 이어 편의점 실정을 알 필요가 있다. 편의점의 존재감은 자전거 여행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외진 시골마을 어디에나 있는 데다 휴게소처럼 도로와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간편조리 음식이 레스토랑 못지 않게 양질의 맛을 제공하는 점. 그중 최고는 ‘바로’ 벤또(도시락을 일컫는 일본어)다. 지역 제철 식재료를 그대로 살린 생선구이와 고기구이, 각종 야채 절임 등의 반찬이 밥과 함께 조화롭게 구성돼 있다. 이 박스 부피 때문에 쓰레기 양에 따른 체감이 더 크다.
아침으로 먹는 주먹밥이나 빵, 과일과 야채 등의 신선식품, 디저트 또한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고 맛도 좋아 사실 따로 식당을 가지 않아도 편의점에서 삼시세끼 해결이 가능하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을 만큼 맛있다는 게 오히려 함정처럼 느껴질 정도. 그런데 일본 편의점의 유일한 단점은 우리나라 편의점처럼 매장 내·외부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일본의 휴지통과 편의점 실정을 인지하고부터는 벤또를 먹을 때 무조건 편의점 밖 한편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 후 편의점 내부에 있는 휴지통에 뒤처리를 하기 위해서.
일본 전역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일본인 유튜버가 자신의 자전거 여행을 가리켜 길바닥에서 밥을 먹고, 길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의미에서 ‘길바닥 생활’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날 벤또를 먹다 말고 그 말이 불현듯 생각나 무릎을 쳤다. 한데 길바닥이 전혀 차디차지 않다. 먹을 수 있고, 잘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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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국도 휴게소. 그러나 휴지통은 없다. |
오늘도 무탈하게 살아간다, 과연 그럴까?
길바닥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길바닥에서의 텐트생활은 장소 찾는 일이 매번 쉽지 않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는 게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믿었던 정보가 실상과 다르면 돈을 떼인 것도 아닌데 커다란 배신감이 물밀 듯 밀려와 주저 앉아 울고만 싶어진다. 하보로 마을 캠핑장이 문을 닫아 실망감에 사로잡혔던 어제의 경험이 또다시 되풀이됐다. 5일 차의 목적지, 오비라 마을 부근에 도착한 뒤 지도상에 표시된 캠핑장을 찾아 언덕길을 올랐는데 슬프게도 결과는 ‘꽝’이었다.
캠핑장을 찾지 못한 것보다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는 데 더 화가 났다. 그렇다고 주저 앉아 화를 내고 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플랜B를 결코 찾을 수 없다. 이 플랜B에는 그 실망감을 위로하기 위한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보상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음번에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다 해도 빨리 훌훌 털어낼 수 있다. 5일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체득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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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라이딩의 활력소가 되어준 편의점 인기 디저트 ‘당고’ (우)휴대폰과 보조배터리 충전은 휴게소에서 주로 했다. |
보상은 온천으로 낙찰됐다. 일단 온천을 즐긴 후 해가 저물고 나서 주변 공원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공원 가장자리 약간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목 좋은 장소를 발견했지만 온천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목이 텐트에 혹여 집중될 염려가 있으니 칠흑 같은 밤을 노리기로 했다. 여정을 시작하고 이튿날부터 5일째까지 서부해안도로를 끼고 달려왔다 보니 이곳 온천의 노천탕 배경 또한 오션뷰다. 온천 내부를 촬영할 수 없다는 점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천탕에서 바라다보는 일몰 풍경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다. ‘아름답다, 황홀하다, 신비롭다’라는 말보다 ‘감사하다’는 말에 가까운 표현이 머릿속을 채운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저물어간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후부터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삶의 기쁨인지 하루하루 그 크기를 실감하고 있다. 오늘 밤의 텐트생활과 내일의 길바닥 생활도 부디 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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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시계방향)매일 봐도 새로운 일몰 풍경. 도마마에 마을 초입에서 로컬 라이더를 만났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고 5일 차에 최고의 쾌청한 날씨를 만끽했다. |
내륙도로로 방향을 꺾었다
안타깝게도 지난밤 텐트생활은 무탈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텐트를 친 장소가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한데 밤새 불어 닥친 거센 바람은 이곳이 산 정상인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너 텐트를 감싼 플라이가 강한 바람에 계속해서 퍼덕거리는 소음을 냈고, 몇 번인가는 텐트 전체가 들썩거리며 흔들리는 위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밖으로 나와 텐트를 고정하고 있는 고정핀의 상태를 여러 번 점검해야 했다. 온천으로 피로가 풀렸던 육체에 다시금 피로가 찾아왔다.
새벽 1시까지 뜬눈으로 바람의 상태를 살피다가 스스로 결론에 이르렀다. 바람이 금세 잦아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강도가 세지거나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일단 잠을 자야 내일의 라이딩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니 더는 바람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두 귀에 귀마개를 단단히 꽂고 잠에 빠져들기를 수도 없이 간청했다. 그렇게 잠이 든 시간이 새벽 2시쯤이었는데 5시경 일출과 동시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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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라 마을에 자리한 온천 전경, 공원 야트막한 언덕에 텐트를 쳤다. |
바람의 존재가 마치 귀신이었나 싶게 평온한 아침 풍경에 피로가 어느 정도 달아났다. 6일 차부터 내륙도로를 달린다. 오비라에서 출발해 서부 해안도로를 따라 루모이까지 16km가량 이동한 다음 거기서 좌회전해 내륙으로 뻗어 있는 233번 국도를 달려 헤키스이까지 간다. 해안도로 대신 내륙으로 방향을 꺾은 건 바닷바람의 영향이 컸다. 몇 차례 역풍을 맞으며 라이딩을 하고 난 뒤 플랜B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첫날부터 엿새 동안 해안도로를 달렸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단 생각도 내륙으로 방향을 꺾은 배경이었다. 그렇게 방향을 꺾자마자 삿포로까지의 거리가 적힌 표지판이 첫 등장했다. 삿포로까지의 거리 103km. 멀게만 느껴졌던 삿포로가 가까워온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페달을 돌리는 다리가 춤을 춘다.세 번째는 꽝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믿었던 캠핑장 정보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게다가 무료 캠핑장이라는 정보를 보고선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무료가 맞았다. 헤키스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콘피라 파크 캠핑장(Konpira Park Camping Ground)’이 바로 그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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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로 이용 가능한 콘피라 파크 캠핑장 |
캠핑장 인근에 다다라서 다소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가 되자 어제의 ‘꽝’이 떠올랐다. 가급적 기대를 내려놓으려 안간힘을 썼는데 언덕 끝에서 저만치 누군가 쳐놓은 텐트가 시야에 들어온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으니 캠핑장이 맞고, 또 무료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깨끗하게 단장된 화장실과 개수대가 갖춰져 있고, 공원 한편에는 작은 호수와 사찰까지 자리해 있다. 여기에 키 큰 단풍나무가 캠핑장을 화려하게 물들이며 낙엽과 도토리 가득 떨어진 산책로를 걷는 여유까지 누린다. 오늘밤 꿀잠은 따 놓은 당상이다.
최고의 밤을 보내고 삿포로까지 갈 수 있을까
홋카이도 지도를 펼쳐 놓고 영어로 ‘Camping’ 혹은 ‘Campsite’라고 검색하면 비교적 많은 수의 빨간색 표시가 전역에 나타난다. 캠핑장의 운영방침에 따라 유료와 무료로 나뉘고, 유료의 경우 정부와 민간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다시 나뉜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은 일단 이용료가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1인 1박 이용료가 캠핑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 500~700엔(한화 4,500~6,300원)을 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민간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은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글램핑에 가까운 환경이나 시설을 갖춘 곳이 대부분이며, 가족이나 그룹 단위의 이용자가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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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까지의 거리가 적힌 표지판이 첫 등장했다. 카이라쿠 파크에서 맞이한 핑크빛 일몰 풍경(우측 사진) |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에서 길바닥 생활에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캠핑장의 존재감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은 마을 중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찾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어쩌다 운이 좋게 인근에 온천이 딸린 캠핑장을 발견할라치면 횡재한 것마냥 미소가 하늘을 찌른다. 이른 아침 가을의 온기를 품고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 콘피라 파크 캠핑장을 떠나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다시 페달을 밟아야 한다. 7일 차의 목적지로 정한 곳, 온천이 딸린 캠핑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약 60km 라이딩을 완수해야 한다.
275번 국도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카이라쿠 파크 캠핑장(Kairaku Park Camping Ground)이 위치한 쓰키가타 마을에 닿는다. 방향이나 도로를 바꿀 필요 없이 무조건 275번 표시만 따라가면 된다. 지도상에서 확인한 카이라쿠 파크 캠핑장은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자연공원 한 가운데 자리한다. 일단 부지가 넓고 화장실도 여러 곳에 위치해 있으며, 편의점도 주변에 두 곳이나 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라이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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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카이라쿠 파크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좌측 하단 사진은 카이라쿠 파크 인근에 자리한 유리카고 온천. |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비를 맞닥뜨리며 우중 라이딩을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콧노래가 멈추진 않았다. 이날만큼은 자전거 여행이 아닌 온천이 딸린 캠핑 여행이 알맞은 표현 같았다. 온천과 캠핑장이 아니었다면 우중 라이딩을 미소로 즐길 수 있었을까. 일주일간 300km 넘게 라이딩을 이어오다 보니 이런 좋은 날도 오는구나 싶다.
기대했던 대로 이곳에서는 최고의 밤을 보냈다. 이제 삿포로로 향할 차례. 삿포로에 도착하면 길바닥 생활을 잠시 청산하고 며칠간 호텔에서 묵을 계획이다. 몸과 마음을 재충전해야 하고, 이따금씩 이상한 쇳소리가 들리는 자전거 체인 상태도 점검해야지. 사실 최고의 밤을 보낸 것에 비해 아침에 확인한 얼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입술 전체가 죄다 부르트고 오른쪽 입술 부위는 부풀어오르기까지 한 상태였다. 까칠한 피부상태도 걱정이다. 라이딩으로 인한 육체의 피로가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해서 기초체력을 키워놓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지만 소용없다. 8일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휴식을 취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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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트 안에서 바라다본 카이라쿠 파크 캠핑장 연못의 풍경 |
삿포로 도심까지 275번 국도를 따라 간다. 어제와 같은 도로인데, 한산했던 어제의 라이딩과 달리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수가 급격히 늘어난 양상이다. 쓰키가타 마을을 벗어나 10여km 달렸을까. 그 지점부터 양상은 더욱 심화되는 듯 보였다. 275번 국도를 따라 삿포로 도심까지 40여km를 남겨둔 상황….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도시로 진입하는 차량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더 이상 국도
를 달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또다시 플랜B가 필요한 시점, 샛길을 찾아 삿포로까지 갈 수 있을까.
일본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5호(24.11.1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