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짓과 발짓, 음정과 음량 모두 완벽했던 앙상블
이해준·박혜미 '역할 그 자체'…강력한 존재감, 유모 역 임은영
↑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전경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1972년~1973년에 연재한 이후 누적 2천만 부 이상이 판매된 명작 순정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각색한 뮤지컬이 오는 10월 13일까지 무대에 오릅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1970년대에 범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메가 히트작'으로 자리잡은 뒤 1993년에 국내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돼 최고 시청률 28%를 기록한 바 있는데요.
'베르사유의 장미'를 창작 뮤지컬로 제작한 배경에 대해 '모차르트!', '엘리자벳', '몬테크리스토' 등 유럽 뮤지컬을 국내에 도입해 성공시킨 EMK뮤지컬컴퍼니의 엄홍현 대표는 "EMK유럽 뮤지컬의 종결판을 만들어보자는 각오로 임했다"라고 설명했는데요.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의 지난달 26일 공연과 전날인 지난달 25일 프레스콜의 하이라이트를 관람한 리뷰를 작성합니다.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는 순정 만화와 달리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희비나 오스칼과 앙드레의 로맨스를 크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프랑스 혁명기에 동시대를 살았던 귀족들과 평민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하며 주제 의식을 드러냅니다.
이런 극에선 갈등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민중의 에너지와 귀족의 분위기를 무대에서 구현해내는 앙상블(코러스이자 군무를 소화)의 역할이 핵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전경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이 뮤지컬의 앙상블은 한 명도 빠짐 없이 시선 처리와 눈빛, 표정과 손짓이 완벽했습니다. 또한 통상 주연의 소리에 앙상블이 묻히거나 앙상블의 소리에 주연이 묻혀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이 뮤지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앙상블은 합창을 할 때 성량이 풍부하면서도, 발음을 정확하게 했고 음량을 조화롭게 조절했습니다. 프랑스 국기를 흔들며 앙상블이 분노를 표현할 때는 같은 시대와 주제 의식을 가진 최고의 명작 뮤지컬 중 하나인 '레미제라블'을 연상케 했습니다.
앙상블의 힘은 '베르사유의 장미' 속 기자 역할인 베르날이 마치 뮤지컬 '엘리자벳'의 암살자 역할인 루케니처럼 구호를 외치며 민중과 함께 나아갈 때 절정에 치닫습니다.
↑ 베르날 역 박민성 배우의 뒤에서 함께 노래하는 앙상블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여러모로 웅장함이 극대화된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는 앙상블을 포함한 각 등장 인물에 서사를 부여한 의상과 소품도 눈에 띄는데요. 100개가 넘는 머리 장식과 손으로 직접 만든 의상 250여 벌, 신발 100여 켤레가 말 그대로 눈을 호강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달 26일 관객들의 집중도를 최고로 끌어올려 넘버(노래)가 끝나자마자 마음에서 우러나온 "최고다!"라는 찬사가 절로 쏟아져 나오게 한 배우는 누구일까요? 바로 앙드레 역 이해준, 폴리냑 부인 역 박혜미와 유모 역 임은영, 총 3명이었습니다.
앙드레 역 이해준은 순정만화 속 앙드레 그 자체였습니다. 1막에서 든든한 연기를 잘했고, 2막의 넘버 '너라면'에서 관객들의 기대감을 고조시켰으며 넘버 '독잔'에선 아름다운 목소리로 짝사랑을 절절히 노래해 관객석이 울음 바다가 되게끔 만들었습니다.
↑ 앙드레 역 이해준 배우와 오스칼 역 옥주현 배우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같은 기간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무대에도 서는 이해준은 앞선 '베르사유의 장미' 프레스콜 자리에서 "주 5, 6회 공연 할 때도 있는데 언제 이렇게 해보나 싶고 쓰임 받을 수 있을 때 감사하게 하고자 한다"며 "평소엔 묵언 수행을 한다"고 말했는데요.
이러한 철저한 목 관리 덕분인지 이해준은 두 개의 뮤지컬을 동시에 뛰며 무대에 오른다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량과 감정 표현을 보여줬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자 색다른 캐릭터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폴리냑 부인 역할을 맡은 박혜미 배우는 커튼콜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 마담 드 폴리냑(폴리냑 배우) 역 박혜미 배우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배우 박혜미가 넘버 '마담 드 폴리냑'에서 요염하게 묘한 노래를 불렀다면 넘버 '내가 사는 세상'에선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절함을 제대로 표현했고 실성한 듯한 웃음 소리, 이후 고음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관객들을 말 그대로 전율케 했기 때문입니다.
오스칼의 유모이자 앙드레의 할머니 역할을 맡은 임은영도 출연 시간이 2분 남짓 되지만 '미친 존재감'(묵직한 존재감)을 선보였습니다. 마치 웰메이드 연극을 보는 듯한 또랑또랑한 발성으로 유모의 감정선까지 관객들이 집중해서 보게끔 만들었습니다.
↑ 유모 역 임은영 배우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이 뮤지컬은 무대 장치 역시 주목할 요소입니다. 서숙진 무대 디자이너는 뮤지컬의 결말 부분에서 뮤지컬 최초로 레이저 다중 고정 장치를 사용하는 색다른 시도를 통해 마치 망자(亡者)도 함께 서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레이저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 속의 군중을 모은 장면인 '몹신(mob scene)'과 유사하거나 그 이상의 효과를 누리게 된 모습이었는데요.
서숙진은 귀족을 곡선으로 서민을 거친 직선으로 표현했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다만, 이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무대 장치일 뿐, 앙드레와 베르날의 서사를 보면 관용과 이해를 통해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뮤지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지난달 25일 진행된 프레스콜에서는 대부분의 배우가 출격한 가운데, 배역별로 최적화된 노래와 연기를 정유지와 이해준, 노윤과 리사 배우가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원작인 순정만화처럼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진중한 오스칼을 연기했고, 남장 여자로서 완벽한 검술도 보여준 배우는 정유지입니다.
↑ 오스칼 역 정유지 배우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정유지는 화가 많아 자꾸 큰 소리로 짜증을 내는 사람이 아닌, 순수하면서 정의로운 오스칼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프레스콜에서 정유지는 넘버 '탄생'과 넘버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외유내강형 오스칼의 면모를 고운 음색으로 고스란히 잘 담아냈습니다.
앙드레 역은 이해준이 완벽하게 소화하며 매력적인 음색을 뽐냈으며, 베르날 역의 노윤과 폴리냑 부인 역의 리사 또한 강력한 카리스마와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했습니다. 이 배우들은 관객들의 '시간 순삭(순간 삭제)'를 책임질 조합 중의 하나입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유독 고난도의 넘버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일부 누리꾼들은 컨셉이 불분명한 곡들이란 비판을 합니다.
창작 뮤지컬이라 곡들이 귀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작곡가 이성준의 스타일대로 곡마다 다양하게 선율과 리듬을 변형하는 변주를 둬 '반복'을 통한 감정의 고조가 생기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뮤지컬을 두 번 이상 관람하면 뇌리에 남는 넘버들이 상당수가 생기는데요.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중독성이 있는 곡들로 구성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정 팬들이 생겨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미'의 작곡가인 이성준은 또 다른 인기 창작 뮤지컬인 '프랑켄슈타인' 등을 작곡한 음악감독입니다.
↑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전경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작품을 올린 EMK뮤지컬컴퍼니는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의 '엘리자벳'과 '레베카' 등과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 혼('지킬앤하이드', '드라큘라' 등 작곡)의 '모차르트!'와 '몬테 크리스토' 등 라이센스 뮤지컬 다수를 국내에 도입해 성공시킨 회사입니다
EMK뮤지컬은 '웃는 남자'와 '마타하리' 등 창작 뮤지컬 또한 성공적으로 무대 위에 올린 바 있습니다.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가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오는 10월까지 공연을 이어가는 가운데, 새로운 창작 뮤지컬을 본 관람객들의 평가에 관심이 쏠립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