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바다에서 목적지를 향해 항로를 나아가는 것. 대한민국 연출 사진의 시작을 연 구본창 작가의 일대는 ‘항해’로 비유된다.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사진계와 미술계에 일대 파란을 연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는 전시가 열렸다. 모험을 시작하거나 꿈꾸는 이들을 위한 등대가 되어줄 만한 전시다.
↑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구본창 항해’ 전(사진 이승연 기자) |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를 이끈 구본창 작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구본창의 항해’(2024년 3월10일까지)는 2024년 서울시립사진관의 개관을 기념해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이다. 독일 유학시절을 비롯해 한국에서 활동, 최근작과 그의 소집품들을 한 곳에 모은 전시로 구본창 작가가 제작한 50여 개 작품 시리즈 중 총 43개 작품 시리즈를 선별했다. 특히 1968년 중학생 때 제작한 ‘자화상’부터 최근 ‘익명자’(1996~)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에 걸친 작품을 최초로 선보이는 기회로,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다양한 인쇄물과 사물, 작품과 전시 관련된 주요 자료를 총망라한 전시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돕는다.
↑ ‘구본창의 항해’ 전시전경(사진 서울시립미술관) |
에디터가 전시장을 찾은 날 공개된 구본창 수집품에는(전시 기간 중 2회에 걸쳐 전시품 변경 예정), 대학생 때 명화를 모사한 습작과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가져온 인쇄물, 1967년 발매된 밥 딜런의 [Bob Dylan’s Greatest Hits] 레코드판, 1974년 작 『Graphic Design of the World 2–History』, 매거진 「라이프」 같이 진귀한 사물들과 함께, 마당에서 발견한 그릇 조각이나 여행을 다니며 모은 듯한 각종 알록달록한 패키지의 일회용 조미료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도 어엿한 ‘수집품’으로 변모해 있다.
↑ ‘호기심의 방’ 섹션 내 구본창 작가의 수집품(사진 이승연 기자) |
그중 대표작인 ‘일 분간의 독백’(1980~1985)은, 1984년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중 당시 흠모했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작품 비평을 받은 후 완성한 작품이다. “유럽식 사고가 아닌, 한국 유학생의 사고로 사진을 만들어 보라”는 겔프케의 조언은, 구본창 작가의 사고와 작업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은 완벽한 조형미의 A컷이 아닌, 조금 더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느낌을 준다. 네 장을 하나로 엮은 사진들은 마치 영화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담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존재에 대한 의구심, 유학 중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점철된 6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이 마치 일 분간의 짧은 꿈처럼 느껴졌음을 표현했다.
↑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Tip ‘모험의 여정’ 섹션에서는 작품과 연동한 자료들이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 구본창 작가의 컬러 사진이 실린 『대한민국 헌법』(현암사, 1987) 실물과, 현대춤 신인 발표회 ‘김승근의 춤’(1987)의 공연 홍보 리플릿 사진을 비롯한 영화, 연극, 무용 포스터 등 구본창 작가가 참여한 다양한 작업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 ‘탈의기 06’, 1988, C-프린트, 111×83cm(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자아에 대한 탐색과 더불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지속했던 구본창 작가의 작업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해갔다.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시각적 작품이나 매체적 실험에 집중했던 작품보다는, 자연의 순환을 주제로 한 고요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응축한 작업, 작품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그물처럼 엮여 순환하고 상생해, 하나의 세계를 향하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 ‘구본창의 항해’ 섹션4 작품 ‘문라이징Ⅲ’(사진 서울시립미술관) |
1998년 탈을 촬영하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구본창은 이후 조선백자, 곱돌 공예품, 지화 등 다양한 사물이 품고 있는 ‘삶의 흔적’을 담은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간다. 특히 각기 다른 박물관에 있는 달 항아리를 피사체로 삼아 다양한 흑백조로 촬영해 마치 달이 뜨고 지는 듯한 풍경으로 재해석한 작품 ‘문라이징Ⅲ’(2004~2006)은 이번 전시장에서 주목해볼 작품이다.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만이 아닌, 한국 현대사진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구본창 작가의 발상과 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작품으로 꼽힌다.
↑ ‘익명자 71’,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5×19cm(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오랜 일기장을 덮고, 새 일기장을 펼치듯 이번 회고전 역시 그가 새로운 항해의 시작으로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 ‘구본창의 항해’ 포스터(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기간: ~2024년 3월10일(일)
장
시간: 평일(화~금) 10:00~20: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글 시티라이프부 이승연 기자(lee.seungyeon@mk.co.kr)] [사진 및 자료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14호(24.1.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