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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중국] 새해 첫날 후통(胡同)에서 만난 역사…올해 한중관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기사입력 2024-01-13 09:00

베이징에서 세 번째 맞는 1월 1일이다. 아직 찬바람이 매섭지만, 새해 첫날부터 집에만 있자니 죄를 짓는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왔다. 엄동설한과 비슷한 처지의 장소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다 찾아간 곳은 후통(胡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뒷골목인데, 번화한 대로변에 비해서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누추한 곳이다. 한편으론 옛 베이징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또 우리에게도 중국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들이 많다. 역사는 아픔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서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일까.

스차하이(什刹海)에 위치한 훠선먀오(敕建火德真君廟)에서 새해 첫날 복을 기원하기 위해 모인 베이징 시민들. / 사진 = MBN 촬영
↑ 스차하이(什刹海)에 위치한 훠선먀오(敕建火德真君廟)에서 새해 첫날 복을 기원하기 위해 모인 베이징 시민들. / 사진 = MBN 촬영


타지에서도 글쓰기 멈추지 않았던 단재…베이징에서 항일잡지 발간

먼저 가본 곳은 차오또우후통(炒豆胡同)이다. 우리로 치면 인사동쯤에 해당하는 난뤄꾸샹(南锣鼓巷) 거리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골목길이다. 허름한 뒷골목의 모습 그대로인 이곳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丹齋 申采浩/1880.11.7.~1936.2.21.)이 1년 반 정도 머물렀다.

단재는 1919년 상하이로 건너왔다가 이듬해인 1920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뒤 1921년 1월부터 1922년 여름까지 이곳 차오또우후통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남 수범 씨도 낳고 한문체 항일잡지 <천고>를 발행한 시기도 이때였다.

단재가 살았던 차오또우후통에서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 사진 = MBN 촬영
↑ 단재가 살았던 차오또우후통에서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 사진 = MBN 촬영


명문가 자손의 누추하지만, 기품 있는 타향살이

차오또우후통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가면 마오얼후통(帽儿胡同)이 나온다. 베이징 관광명소인 스차하이(什刹海)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새해 첫날 인파로 북적이는 스차하이를 등지고 길 건너 골목길을 5분 정도 걸었을까.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우당 이회영 선생(友堂 李會榮/1867.3.17.~1932.11.17.)이 살았던 초라한 집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쓸쓸해진다.

조선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출신 우당이 고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모든 재산을 조국 광복에 쏟아붓고 머나먼 타향의 이런 누추한 곳에서 고군분투한 것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 수 없다.

우당이 기거했던 마오얼후통 29호. 지금은 바로 옆에 세워진 후통학교의 부속 건물로 쓰이고 있는 듯하다. / 사진 = MBN 촬영
↑ 우당이 기거했던 마오얼후통 29호. 지금은 바로 옆에 세워진 후통학교의 부속 건물로 쓰이고 있는 듯하다. / 사진 = MBN 촬영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일본군 지하 감옥…하필 그곳만 재건축

육사 이원록 선생(陸史 李源祿/1904.4.4.~1944.1.16.)이 일본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다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두고 순국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감옥도 베이징 후통에 있다. 마오얼후통에서 새해 첫 찬바람을 맞으며 다시 20여 분을 걸어 동창후통(東廠胡同) 28호 건물을 찾아가 봤다.

이제는 리모델링이 돼서 신식 주거지로 바뀌었고, 입구엔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주민이 아니면 마음대로 드나들지도 못하게 됐다. 기자는 다행히 문 앞에서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들어가는 주민의 도움으로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하 감옥의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문을 열어 준 주민에게 이곳의 예전 모습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최근 새로 이사 와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곳을 나와서 동창후통의 나머지 길을 걷다 보니 하필 28호만 리모델링이 돼 있었다. 일부러 그러진 않았겠지만, 우리 역사에서 의미 있는 장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육사가 갇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지하 감옥 시설과 주변 건물들은 이제 신식으로 다시 지어져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 사진 = MBN 촬영
↑ 육사가 갇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지하 감옥 시설과 주변 건물들은 이제 신식으로 다시 지어져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 사진 = MBN 촬영


열강의 중국 침략 교두보 흔적도 베이징 후통에 고스란히 남아

베이징 후통이 우리에게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진 않다.

동창후통에서 방향을 다시 남쪽으로 잡고 걸어서 30분 정도를 가다 보면 동쟈오민샹(東交民巷) 후통이 나온다. 이곳은 여느 후통과는 달리 거리도 넓고 누추한 집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서양식으로 지어진 멋들어진 건물들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실제로 새해 첫날 한겨울 찬바람에도 사진을 찍기 위해 나온 젊은 시민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성당부터 호텔, 박물관 등등을 보면 유럽의 거리처럼 느껴져서 화창한 날씨에는 웨딩촬영 장소로도 인기라고 한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열강의 대사관이 이곳에 속속 설립됐고, 사관거리로 개명된 뒤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11개 나라가 연합행정기구를 설치하고 각국 대사관과 은행 등 관련 기관이 설치됐다고 한다. 수도 베이징 한복판이지만 중국인들의 발걸음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뚝 끊기고 말았다. 각국 대사관들이 전부 싼리툰(三里屯) 지역으로 옮겨지고 이제 이 건물들은 호텔이나 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1910년 지어진 일본쇼오킨은행(日本正金銀行) 건물인데 현재는 중국법원박물관(中國法院博物館)으로 쓰이고 있다. / 사진 = MBN 촬영
↑ 1910년 지어진 일본쇼오킨은행(日本正金銀行) 건물인데 현재는 중국법원박물관(中國法院博物館)으로 쓰이고 있다. / 사진 = MBN 촬영


새해 한중관계는 어떤 모습일까…양국 모두 “젊은 세대 교류 넓혀야

새해 첫날 우리나라와 중국에게 아픈 기억이 스며들어 있는 곳을 걷다 보니 문득 올해 한중관계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다.

최근 만난 한 중국 학계 관계자는 ”양국 간 교류, 특히 젊은 세대의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사드 사태부터 시작돼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거의 5~6년 동안 교류가 단절되다시피 하면서 특히나 양국의 젊은 세대들이 상대방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너무 많이 쌓였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 역시 이런 부분을 이해하고 있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게 누가 ‘오늘부터 이렇게 하자’라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방법론에 있어서는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1900년대 초 프랑스 신부가 세운 성미카엘 성당(東交民巷天主堂). 동쟈오민샹 거리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사진 촬영지다. / 사진 = MBN 촬영
↑ 1900년대 초 프랑스 신부가 세운 성미카엘 성당(東交民巷天主堂). 동쟈오민샹 거리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사진 촬영지다. / 사진 = MBN 촬영


지정학적 리스크 여전…한중 양국, 관계 개선 온도차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관계 회복이 더딜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특히나 현 정부의 외교기조인 한·미·일 동맹에 대한 중국의 불만은 익히 알려져 있다. 기자가 만난 거의 모든 중국 사람들은 “현 정부의 대중 정책에 대해서 별로 기대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중국 관영 글로벌벌타임스도 최근 한‧미‧일 3국이 제1차 인도‧태평양 대화를 열고 대만 문제를 거론하자 “중국 발전을 저지하려는 집단적 시도”라고 발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정부 역시 한중관계 개선에 조급하게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이 분명하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한중관계에 대해서 “관계 발전의 속도나 규모보다는 신뢰 증진에 초점을 맞춰 미래를 향한 실질 협력 사업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당장 뭘 하겠다는 게 아니라 급할 거 없이 시간을 갖고 천천히 생각해보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한중 양국은 이웃 국가로서, 또 여전히 막대한 교역규모로 볼 수 있듯 경제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어서 결국

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난달 기준으로 20년 만에 월간 수출 규모에서 미국이 중국을 제치고 우리나라 제1 수출국이 됐다고는 하
지만 연간 기준으로는 아직 對중국 수출 비중이 1위이다.

결국 정치와 경제라는 두 축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어디에서인가 외교의 축을 세우고 한중 두 나라가 마주 앉아야 하지 않을까.

[윤석정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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