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클래식 사랑방 풍월당 창립 20주년 기념
1922년~2023년까지 한국 가곡 100년 앤솔로지 담아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지난 11월3일 압구정에 위치한 클래식 마니아들의 아지트 ‘풍월당’ 구름채엔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카머젱거(Kammersanger: 궁정가수)’ 호칭을 받은 세계 최정상 베이스 연광철이 무반주로 부른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유럽에서 3대 테너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와 비견되며 바그너 오페라에서 공연하던 세계적 대가가 다시 고향인 충청도 시골 소년으로 돌아가 부르는 노래다. 앨범 커버에는 지난 10월 작고한 故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가 디자인돼 있다.
↑ ‘고향의 봄’은 세계적인 바그너 가수인 베이스 연광철의 첫 한국 가곡 독집 음반이다. |
풍월당 박종호 대표는 이러한 한국 가곡의 시적 화자에 대해 “나를 버린 그를 잊지 못해 돌아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별의 정한情恨”으로 설명한다. 성량만을 앞세우거나 표현에 욕심을 내는 가창으로는 그 본질을 붙잡기 어려우므로, ‘더 덜어내고 덜 치장해 마음을 동여매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
↑ 베이스 연광철 |
“한국 시골에서 보는 보름달과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가는 길에 산 하나 없는 곳에 떠 있는 보름달은 다르다. 30년 간 유럽에서 활동하고 가깝게 생활했지만 난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정서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한국 사람이었던 거다. 내가 전달하는 게 과연 맞나 늘 생각했는데, 가곡을 부를 때는 온전히 제 것을 부르는 느낌이라 편하고 즐거웠다.”(연광철)
↑ ‘고향의 봄’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베이스 연광철 |
“‘고향의 봄’은 원래 그 선율 그대로 한번 불러보고 싶어 무반주를 택했다. 시골에 살면서 느꼈던 시골의 정취 등을 떠올리며 노래했는데, 그 과정이 기쁘고 행복했다.”(연광철) 베이스 연광철은 ‘고향의 봄’을 함께 작업한 피아니스트 신미정과 함께 오는 12월3일 예술의 전당에서 음반 수록곡을 중심으로 한 공연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 세계 정상급 베이스 연광철이 처음 낸 한국 가곡 음반이다. 박서보 화백이 생전 마지막으로 후원한 단색화로 표지 디자인을 했다. |
CD 및 디지털 음원으로 동시 발매된 [고향의 봄]은 일반 CD 부클릿보다 글자가 크고, 책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며, 동봉된 책갈피의 QR로 음원을 바로 들을 수 있다. ‘고향의 봄’을 통해 국내 최초로 한국 가곡 독집 음반을 해외로 유통한 풍월당은 내년 초에는 초도한정 LP음반도 발매할 예정이다. 김소월, 박목월 등 근대 화가의 시에 박 화백의 그림, 베이스 연광철의 목소리가 합쳐져 아름다운 가곡의 봄이 다시 돌아왔다.
↑ 한국의 시어, 연광철의 음악, 박서보 화백의 그림이 들어간 가곡집 ‘고향의 봄’ |
‘고향의 봄’(1926) ‘비목’(1969) ‘청산에 살리라’(1973) ‘그대 있음에’(1964) 등 옛 가곡과 함께 현재 영어, 불어권에서 널리 애송하는 나희덕 시인의 ‘산속에서’(2023)와 민중적 생명력을 노래하는 황경민의 시 ‘산복도로’(2023)에 지금도 미국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김택수 작곡가가 곡을 붙인 신작을 포함, 총 18곡이 담겼다.
↑ ‘고향의 봄’을 함께 녹음한 피아니스트 신미정(좌)과 베이스 연광철(우) |
“오스트리아, 독일, 유럽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국 가곡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바로 다가오는 뭉클한 감정이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졌다. 고향이 진도인데 녹음을 통영 바닷가에서 했다. 녹음하는 일주일간의 시간이 선물 같았다.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게 그런 시간과 추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피아니스트 신미정)
↑ 베이스 연광철[사진=풍월당] |
코로나로 인해 클래식 강좌가 멈추고, 리스너들의 발걸음이 줄었을 때도 풍월당은 청자들을 기다리는 대신, 비정기 무크지 ‘풍월한담’과 음악 큐레이션 구독 서비스를 들고 사람들을 직접 찾아갔다.
↑ 클래식 음반점으로 문을 연 지 20년을 맞은 풍월당 |
↑ 박종호 대표(사진=풍월당) |
“‘고향의 봄’이 나온 뒤, 풍월당의 20대 직원도 “클래식을 모르는 할머니께 들려드릴 수 있는 곡이 처음 생겼다”며 눈물을 흘렸다. 뉴욕에서 온 한 한국인 할머니가 풍월당을 방문해 그 자리에서 1만 달러를 후원하는 일도 있었다. ‘고향의 봄’은 그런 ‘풍월당 20년지기’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앨범이다.“(풍월당 박종호 대표)
“풍월당, 20년간 음반 사주는 이들이 끌어온 것”
↑ 풍월당 박종호 대표(사진=풍월당) |
Q. 풍월당 창립 20주년을 맞은 소회가 어떤가.
감개무량하다. 20년 전에 작은 레코드 가게로 시작했다. “K팝 로드도 있고 아이돌 동상도 있는 압구정에 왜 풍월당을 만들었냐?”고 하길래 “사막에 오아시스를 짓는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여전히 음악을 듣는구나 싶다. 듣는 이들이 있다면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호메로스’를 이제 안 봐도 고전으로서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20년 동안이나 문을 닫지 않고 버텨온 것 자체가 감동적인 일이다. 풍월당은 내가 아니라 20년 동안 음반을 사주신 분들이 끌어온 것이다.
↑ 공연과 음악 감상이 가능한 풍월당 구름채 |
예전엔 매년 가을 ‘한국 가곡의 밤’이 열렸다. 라디오나 TV, 다방에서도 가곡이 나왔는데 경제 논리에 밀리고 사람들이 듣지 않기 시작했다. 서양 음악이 들어온 지 150년이 됐는데 내세울 수 있는 한국 음악이 있는가?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우고, 동네 삼촌이 부르는 걸 듣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들었던 것이 가곡이다. 오랫 동안 우리의 가슴을 적셔온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우고 선배들이 불렀던 곡들, 가장 많이 알고 있고 기본이 되고 제 또래, 부모님들이 잘 아는 곡들로 선정을 했다. 나머지 곡들도 기회가 되면 또 소개할 것이다.
Q. 연광철 성악가를 선택한 이유는? 세계 유명한 모든 극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20초 안에 연광철 선생님 얘기가 나온다. ‘고향의 봄’은 바그너 오페라에서 공연하던 세계적 대가가 다시 충청도 시골 소년으로 돌아가서 불러주는 음반이다.
↑ 풍월당 배경의 세 사람(좌로부터 연광철, 신미정, 박종호). (사진=풍월당) |
18개의 시를 4개 국어로 다 새로 번역하고, 거기 어울리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뭘까 생각하다가 서양 사람들이 잘 알 만한 인물을 골랐다. 박서보 화백의 아드님이 풍월당의 팬이자 손님이었다. 박서보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의 봄’ 생 음악을 들려드렸더니 2개 정도 당신 작품을 보여주셨다. 음악, 시, 디자인 그림까지 모든 것이 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에 공명하셔서, 대가 없이 허락을 해주셨다. 그래서 현재의 커버(단색화 ‘묘법 No. 980308’)로 결정이 된 거다. 음반이 나오기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 1900년경의 빈 카페 느낌의 풍월당 ‘로젠카발리에’는 서울에서 사라진 클래식 음악 다방이 콘셉트다. |
음반이 없어지면 음악도 없어진다. 종이책이 사라지면 독서도 사라진다고 본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왔던 손님이 세월이 지나 다시 풍월당을 찾았다. “집에 있는 LP를 보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다시 와봤더니 풍월당 공간이 그대로 있다”고 하더라. 난 그런 게 중요하다. 그런 얘길 들으면 함부로 공간을 못 접는다. 풍월당은 그런 손님들과 직원들 힘에 의해서 굴러간다.
20년쯤 운영해 보니 ‘공간’이 가지는 가치를 더 생각하게 된다. 많은 분들이 이게 다 제 건물이라고 하는데 월세만 수천만 원이다. 매일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게 우리 힘이다. 손때 묻은 것들이 지닌 가치 때문에 월세 더 싼 데로 옮기지도 못한다(웃음).‘건물’이 있는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그게 풍월당이 살아온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 박종호 대표는 “한국 가곡을 계속 알릴 것”이라고 말한다. |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0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