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고문을 당하면서 저들이 가르쳐주는 힌트에 전 모든 것을 실토하겠다고 했으며 저 자신도 일단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나 때문에 고통 중에 지내게 될 친우들께 너무도 죄송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3년 12월 11일 숨진 고 한희철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 적힌 내용입니다.
그리고 40년이 흐른 지난 8월 23일 서울중앙지법 565호 법정, 한 씨의 유족들에게 국가가 5억 원을 배상하라는 선고가 내려집니다.
이번 ‘법원 앞 카페’는 고문에 못 이겨 동료들의 정보를 말했다가 죄책감 속에 숨진 한 씨에게 40년 만에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된 사연을 전해보고자 합니다.
↑ 고 한희철 씨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 씨는 1979년 서울대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국립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철도청에 근무하다가 ‘철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수재이기도 했지만 한 씨는 학생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4학년이 되는 1982년까지 ‘카톨릭학생회’ 활동을 비롯해 지역학생 모임인 ‘탄천클럽’을 조직했고, 노동자 야학인 ‘샘터교양교실’ 교사로도 활동했죠. 유신 말기부터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 초기까지 매우 어두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4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1982년 육군에 입대한 한 씨는 1년 뒤인 1983년 휴가 중 친구 A를 만나게 됩니다. A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수배 중이었는데 한 씨에게 주민등록증 위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씨는 친구인 동사무소 방위병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대신 A에게 주민등록증 용지를 구해달라는 메모를 남기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같은해 12월, A가 국군보안사령부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맙니다. 당시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뿌리뽑겠다며 보안사가 주도한 비밀공작 이른바 '녹화사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보안사의 수색 과정에서 한 씨가 남긴 메모도 발견됐죠. 이에 한 씨도 보안사에 체포됐습니다. 영장도 없는 체포였습니다. 체포된 12월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보안사 과천분실에서 한 씨는 여러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조사관은 곤봉으로 한 씨를 구타하며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해라.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라”라고 말했습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한 씨는 결국 운동권 동료와 선후배들의 인적사항, 서클 조직체계도, A의 주민등록증 위조를 돕게 된 계기 등을 진술했습니다. 또 군입대 전 운동권 활동을 반성하고 앞으로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반성문과 이후 보안사의 요구시 적극 협조하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나서야 풀려나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 씨가 부대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11일 새벽, 부대 경계호에서 총소리 여러발이 났습니다. 다른 경계호에서 근무 중이던 같은 조 병사가 가 보니 한 씨가 총상을 입고 숨져 있었습니다.
앞서 한 씨는 사무실에 유서를 남겨놨습니다.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고 죽을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경제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씨는 ‘성남 OO총무에게 보내는 글’도 별도로 남겼습니다.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 고 한희철 씨가 쓴 ‘성남 OO총무에게 보내는 글’ 중
한 씨가 고문을 받으며 결국 동료를 발설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씨의 사망을 수사한 군 헌병대는 한 씨가 숨진 이유에 보안사의 조사와 고문이 있었다는 점을 은폐했습니다. 당시 사단 헌병대장은 한 씨가 보안사에 연행돼 조사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수사관에게 보안사 조사와 사망의 관련성을 수사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단 군의관은 허리와 허벅지 타박상 등 고문 흔적을 확인하지 않고 사체검안서를 썼습니다. 한 씨의 유서에는 ‘보안사령관 박준병 귀하’라는 내용도 담겨있었지만 부대 관계자는 이 부분을 잘라내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헌병대는 ‘한국 민주정치의 미흡성을 비판하고 빈곤한 사회생활에 대한 경제정의를 주장하며 현실을 비판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고 내사종결했습니다. 한 씨의 유족들은 반발했습니다. 한 씨의 부친이 1984년 보안사 관계자에게 한 씨를 고문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보안사 관계자는 “보안사에서 한 씨를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습니다.
한 씨 사망의 진상은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2002년이 돼서야 군 의문사위원회 조사로 드러났습니다. 위원회는 한 씨가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유족들에게 1억 6,000만 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했습니다. 국방부는 한 씨를 순직으로 인정했습니다.
↑ 지난 2004년 6월 9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홍춘의 상임위원(좌측3번째)과 조사관들이 80~90년대 강제징집 녹화사업에 당시 보안사령부가 개입한 의혹이 있는 사건들의 자료 열람을 위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기무사령부를 방문, 실지조사를 하기에 앞서 취재진에게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그리고 다시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21년,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앞서 2018년 헌법재판소가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은 화해로 간주한다’는 부분이 위헌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불법행위로 생긴 정신적 손해는 당사자와 유족들이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 서울중앙지법 (사진=연합뉴스) |
2년에 걸친 재판 결과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4부(박사랑 부장판사)는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현재 생존해 있는 한 씨의 형제들에게 모두 5억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습니다. 판결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한 씨의 사망이 비록 자살이라도 자살에 이르게 된 게 보안사의 민주화운동 조사과정에서 벌어진 가혹행위와 이로 인한 좌절감과 두려움, 죄책감 등으로 인한 것이므로 자살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에 기인한 것이고 이는 보안사의 불법 연행과 조사 및 폭행·가혹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다.
군 당국은 한 씨의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 타박흔을 확인하고도 사망과 보안사 조사의 관련성을 수사에서 배제하고, 한 씨가 현실을 비관해 자살한 것이라고 수사를 종결하고, 유족들에게 보안사에서 고문당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하는 등 사망 경위를 은폐·조작하였다.
- 고 한희열 씨 유족 국가배상 1심 선고 중
재판과정에서 정부 측은 형사재판의 공소시효과 같은 민사상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불법행위가 있었던 건 1983년이고 민주화보상금을 받은 2002년에는 불법행위를 인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이내’ 또는 ‘불법행위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 이내’라는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배상 소송을 할 수 있게 된 헌재 선고가 내려진 2018년부터 시효가 계산된다고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심에서 사실상 패소한 정부 측은 항소했습니다. 그런데 배상 선고를 받아낸 한 씨 유족 측도 항소했습니다. 이유는 한 씨 형제들 몫의 위자료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겠죠. 사실 한 씨 형제들에게 배상하라고 한 5억 원은 한 씨와 한 씨 형제 부모님의 몫입니다. 한 씨에게 배상해야 할 금액이 3억 원, 한 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각 1억 원씩 모두 5억 원이 인정됐는데 한 씨와 한 씨 부모님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5억 원을 남은 유족인 형제들에게 주라고 한 것이죠.
한 씨 형제들은 부모님을 비롯해 아니라 한 씨 사망 당시 당시 가족들 전부가 정신적 손해를 본 만큼 한 씨 형제들 몫으로도 각각 3,000만 원씩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형제들의 경우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봤습니다. 헷갈릴 수 있는데 이유는 이렇습니다.
1) 2004년 민주화보상금을 받을 당시 지급대상이 ‘민주화운동 관련자 또는 유족’으로 돼 있고 ‘유족’은 민법상 상속인을 의미하는데 당시 상속인은 생존해 있던 한 씨 부모님이었습니다.
2) 즉, 보상금을 신청할 자격이 부모님에게만 있었고, 이 보상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헌재 선고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배상 청구권은 소멸시효가 헌재 선고가 있었던 2018년부터 계산이 됩니다.
3) 반면, 2004년 당시 애초에 형제들은 민주화보상금 수령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상소송을 하려면 이때 했어야 하고 소멸시효도 2004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2021년 배상소송을 할 때는 시
이에 대해 한 씨 유족 측 대리를 맡은 이영기 변호사는 기자와 통화에서 “형제나 가족을 따로 떨어뜨려 소멸시효를 계산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며 상식에 안 맞는 판단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한희열 씨 사망으로부터 국가책임의 완전한 인정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재판은 항소심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