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 속 외씨버선길을 걷다 술 향기에 젖다
주실마을에서 만난 지훈과 동진 형제
복합문화공간으로 부활한 영양의 100년 양조장
조지훈의 ‘승무’에서 이름을 딴 영양의 외씨버선길을 걷다가, 항일 연극을 제작했던 조지훈·동진 형제를 만나러 주실마을로 향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양의 100년 양조장은 한때 문을 닫았다가 힙하게 거듭났고, 영양의 은하수를 닮은 막걸리에서는 감칠맛이 느껴졌다. 조지훈이 그토록 사랑한 고향 영양의 막걸리, 그 맛을 낳은 건 바로 영양의 별빛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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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시인의 초상화 아래에 그가 서재에 앉아서 집필하던 사방탁자가 놓여 있다(지훈문학관 내 촬영). |
“가족은 아랑곳없이 당신 혼자만 짧고 굵고 멋들어지게 마흔 여덟 해를 사시다 멋만 남겨놓고 가버리신 야속한 당신은 이 글을 쓰실 당시 겨우 22세에 이미 멋쟁이가 되어 계셨습니다. 당신이 가신 5월이 다시 돌아오는데, 당신이 평생 사신 햇수보다 아홉 해나 더 먹은 당신의 자식은 당신이 멋을 설(設)하던 나이의 곱절에다 십 년을 더 보탠 나이가 되었어도 당신의 그 멋의 근처도 못 가고 있음이 부끄럽습니다.” - 조지훈 선생 장남 조광렬의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中
높고 푸른 글의 정신, 조지훈과 그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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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문학관 앞의 조형물 |
봉화, 청송, 영양, 영월을 쭉 아우르는 외씨버선길은 경북 영양이 낳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쓴 시 ‘승무’(‘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에서 따왔다. 옛길을 쭉 이으면 버선 모양이 된다는 데서 연유했다. 영양시장에서 그가 태어난 일월면 주실마을까지 13.5km 외씨버선길 6구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조지훈문학길’이 됐다. 무려 둘레길 이름을 작품에서 따왔을 정도로 영양이라는 고장은 작가 조지훈을 사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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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양이 고향인 ‘승무’의 작가 조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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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의 형 동진의 사진(사진 지훈문학관) |
1920년 영양에서 태어난 조지훈은 ‘승무’, ‘낙화’ 등의 민족시를 탄생시키며 한국 근대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조선어학회의 원고를 정리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양 지훈문학관을 갈 때마다 기자는 조지훈(1920~1968)보다 스무 살에 요절했다는 형 동진(1917~1937)의 흑백 사진에 더 시선을 뺏긴다.
긴 머리 가르마의 1930년대 모던보이 같은 헤어스타일. 불과 열네 살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 문집을 만들던 소년. 상경해 영양 출신 오일도 시인에게 시를 배웠지만 일제 치하의 참담한 현실에 절망해 낙향한 동진은 항일 연극을 만들며 일본 경찰의 수색과 압박에 시달린다. 그리고 일경의 집요한 취조와 가택 수색, 감시 속에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사후에도 일제의 감시 때문에 대부분의 시들이 불태워져 유고시집에 실린 시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약관의 시인. 형 동진의 죽음과 전쟁을 겪은 후 동생 지훈의 삶도 많은 것이 바뀐다.
지훈을 낳은 호은종택과 그를 키운 주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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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의 형 동진은 항일 연극 활동을 하다 일경의 고문에 시달린다. 사진은 동네 주민들과 항일 연극을 제작하던 소년회 당시의 모습(사진 지훈문학관). |
“동진과 지훈 형제는 소년회를 조직, 항일 연극을 만들어 올린다. 이로 인해 일경의 감시가 심해졌는데 지훈은 당시 “열여섯 살짜리와 열세 살짜리 어린 형제가 외가에 다니러 가도 경찰의 내방을 받던 웃지 못할 감시의 세월”이라고 기억한다. 지훈문학관에는 눈빛이 형형한 지훈의 형 동진의 사진이 걸려 있다.”
6.25 때 뱃전에 매달린 채 한강을 건넌 조지훈은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한 할아버지, 전쟁 때 얻은 병으로 사망한 모친, 납북된 부친과 익사한 남동생 등 전쟁의 비극을 겪는다. 동양적 자연관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후 형 동진처럼 조국의 역사적 현실을 담거나 정권을 질타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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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문학관 앞 조형물과 내부에 전시된 조지훈 시인의 물건 |
지훈문학관에는 동진과 지훈이 항일 연극을 제작하던 소년회 시절, 가족 이야기와 육필원고 등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사진, 영상, 육성 등으로 전시돼 있다. 그중엔 청록파 동료였던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걷고 있는 사진도 걸려 있다. 조지훈이 앞서 성큼성큼 걷고, 그 뒤를 박목월이, 박두진은 가장 뒤에 뒤쳐진 채 걷고 있다. 헤드폰으로 그가 여동생 조동민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를 듣고 전시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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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시인의 고향, 주실마을 |
마을 입구 시인의 숲까지 걸어본다. 상경할 때까지 문학의 꿈을 키우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본가인 방우산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학관 뒤편에는 산골짜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동상과 20여 개의 시비를 세운 지훈시공원이 서 있다. 마을 끝으로 가면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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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 |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 같은 남인(南人)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렀다 한다. 검남들은 이제 다 졌으나 작품은 남았다. 다시 주실마을을 조망해 본다. 지훈과 형 동진, 그리고 시 잡지를 복간하려다 실패하자 폭음과 간경화로 사망한 오일도 시인까지 영양은 가슴이 뜨거운 문인들을 많이도 길러냈다. ‘문필봉’과 ‘연적봉’이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글의 물이 마를 날이 없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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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은종택 |
Info 지훈문학관 영양군 일월면 주실길 55
호은종택 영양군 일월면 주실길 27 외
100년 양조장이 있는 영양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라 했던 조지훈은 술꾼의 품격을 9급부터 9단까지 나누는 주도(酒道) 유단론까지 만든 술꾼이었다. 해방될 때까지 월정사와 영양을 오가며 숨어 지냈던 시인은 월정사에 있을 때 직접 막걸리를 빚어 마셨는데, ‘공자의 쌀, 노자의 누룩, 석가의 샘물’로 빚었다는 이유로 술의 이름을 ‘삼도주(三道酒)’라 지었다. 그는 1958년 ‘멋, 삼도주’(신태양(1958))이라는 글에서도 삼도주를 이야기한다.
“나는 항상 삼도주를 마신다. (중략)삼도주란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공자가 애써 가꾸신 쌀과 노자가 손수 만든 누룩으로 석가모니가 길러 오신 샘물로 빚은 술인 까닭이다. 나는 반사십에 삼도주를 배운다. 몇 해나 취해야 나를 볼는지 알 수 없다. 이백은 선주만 마셨으니 신선이 되었지만 이 삼도주는 신선도 부처도 성현도 아무것도 될 리 없다.” - 조지훈 ‘멋, 삼도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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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은 술꾼의 품격을 9급부터 9단까지 나누는 주도(酒道) 유단론까지 만든 술꾼이었다. 영양양조장에 전시된 그의 사진. |
조지훈이 사랑했던 삼도주의 고향, 영양 막걸리는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1915년에 ‘영양주조’로 문을 열어 단양 대강양조장(1918), 평택 지평양조장(1925), 진천양조장(1930), 당진양조장(1933)보다 먼저 막걸리를 만들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1930년대 언론에서 ‘제2의 개성’, 경북 제일 부자라고 할 정도로 상업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술’ 때문. 오죽하면 1933년 당시 영양에 10대뿐이던 전화 중 6번이 민간시설로서는 처음 영양주조에 놓였을까. 1~5번까진 관공서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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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에서 민간시설로는 처음 영양양조장에 전화가 놓였다. |
영양양조장은 1926년에 공식적으로 사업체를 등록, 3대가 100년 넘게 막걸리를 빚었지만 거대 주류 업체 탁주가 공급되며 2018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한다.
그러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새롭게 부활한 것이 폐업 5년 만인 2022년. 영양군은 영양 출신인 권원강 교촌에프앤비㈜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지역 상생을 위해 ‘발효공방1991’이라는 새로운 농업회사법인을 설립,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양양조장을 카페 및 복합문화공간으로 부활시켰다.
Info 발효공방1991 경북 영양군 영양읍 군청길 49
100년 만의 외출…복합문화공간이 된 백년 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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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 100년 양조장의 모습 |
‘백년을 빚은 양조장’이라고 적힌 기둥 위에는 호리병 모양의 술병과 잔 조형물이 놓여 있다. 영양양조장이 공식 설립된 해인 ‘1926’이 적힌 바닥엔 영양의 특산물인 붉은 고추가 그려져 있다. 술통을 가득 실은 자전거 모형 옆 주막에서 모자를 쓴 남자가 탁주 잔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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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양조장의 모습 |
분석실과 양조실이 있는 내부로 들어가보니 휴일도 없이 매일 공장을 가동했을 정도로 호황이었던 1973년에 썼던 술 항아리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발효실 자리에 새로 오픈한 ‘카페소풍’에서는 막걸리 타르트와 막걸리 스무디, 막걸리 푸딩 등을 판다.
카페에는 양조장과 40년을 함께 한 마지막 공장장 권부웅과 마지막 경영자 권시목 등 영양양조장을 지킨 이들의 사진도 걸려 있다. 공사과정에서 드러난 일제시대 지붕과 보온을 위해 이중으로 만든 벽면을 그대로 살렸는데, 많은 이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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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100년 전 주정계, 막걸리 푸딩, 카페로 개조한 유리벽 너머로 왕겨가 쌓여 있는 모습, 100년 전 쓰던 술통과 주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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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조장의 100년 된 금고 |
발효실로 쓰던 유리벽 너머에는 왕겨가 쌓여 있고, ‘영양탁주’라고 적힌 운반상자와 도수를 측정하는 주정계가 카페 오브제가 되어 있다.
“너무 무거워서 옮기지도 못했어요.” 한때는 양조장 사무실이었던 카페 벽장을 연 조합 관계자는 일제 강점기부터 양조장 내에서 사용되어 왔다는 100년된 금고를 보여주었다.
술 향기를 품은 금고는 많은 이들의 땀과 희망을 머금은 채 카페 한편에서 잠자고 있었고, 막걸리를 빚기 전 노동자들이 몸을 씻고 들어갔다는 목욕탕 자리는 현재 탕비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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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 당시 사진. 우측 하단에 양조장 노동자들이 막걸리를 빚기 전 몸을 씻었던 목욕탕이 보인다. |
100년의 더께가 힙하게 내려앉은 영양 백년 양조장에서는 최근 청년 양조사들이 영양의 별빛을 닮은 ‘은하수’ 막걸리를 만들어냈다. 우유처럼 흰 빛,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누룩의 맛. 아스파탐과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았다는 은하수 막걸리는 서울에서는 3대째 전통을 계승 중인 박가네 빈대떡 매장(한정 판매)과 이태원의 교촌 플래그십 매장 ‘교촌필방’에서도 판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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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탁주조합의 임금대장도 카페 내에 그대로 남아 있다. |
영양의 쌀과 물, 누룩으로 만든 은하수 막걸리를 마시며 조지훈 선생의 ‘삼도주’를 따라 읊조려 본다. ‘반사십 아닌 사십에 100년 막걸리를 배운다. 몇 해나 취해야 나를 볼는지 알 수 없다. 이백은 선주만 마셨으니 신선이 되었지만 나는 신선도 부처도 성현도 아무것도 될 리 없다.’ 그가 술을 좀 덜 마셨다면 우린 그의 시를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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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시계방향)양조장에서 카페가 된 영양탁주조합, 은하수 막걸리, 전성기였던 1970년대 쓰던 술항아리 |
영양의 먹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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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포식당 돼지주물럭 |
잊을 수 없는 주물럭의 맛, 맘포식당숯불갈비 50년이 넘도록 한우와 돼지 주물럭을 내온 맘포식당은 1800년대부터 오일장으로 유명했다는 서부리 영양재래시장 입구에 자리한 곳이다. 청정지역에서 키운 우수한 품종의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즐길 수 있는 영양에서도 오래된 식당. 돼지고기와 묵은지, 육수를 끓인 후 콩나물을 나중에 넣으면 콩나물의 아삭한 맛을 더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남은 반찬들과 주물럭 고기를 볶아 먹는 볶음밥은 놓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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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항약수식당의 닭불백(닭백숙+닭불고기) |
백숙과 불고기의 만남, 양항약수식당 ‘이 길이 맞아?’라는 생각이 든 뒤로도 차로 10분은 더 가야 식당이 나온다. 온천이 많은 청송과 진보에도 약수로 만든 닭불백(닭백숙+닭불고기)을 맛볼 수 있는데, 영양에선 청송처럼
완전히 다진 떡갈비 형식이 아니라 매콤한 불맛이 살아 있는 적당한 식감이 다르다. 먼저 닭불고기를 먹고 있다 보면 백숙이 나오는데 다리가 통으로 들어가 있다. 김치와 양파초절임은 녹두가 들어간 닭죽과 무척 환상적인 콜라보를 이룬다.
[글·사진 박찬은 기자 park.chaneun@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