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 시점에서 바라본 편의점
애초 편의점은 생활의 질적 편리를 위해 생겨난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편의점은 우리 삶의 가장 선두에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가늠케 하는 새로운 지형도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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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Unsplash(Joshua Rondeau) |
1989년 세븐일레븐이 편의점 시작
나는 보통 출근 전에 커피 원두를 분쇄하고, 드리퍼를 사용해 커피를 내린다. 그걸 텀블러에 담아 출발하는 편이다. 이 루틴이 귀찮을 때면 꼭 편의점에 먼저 들른다. 바쁜 아침에 굳이 카페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최근의 편의점이 (질이 나쁘지 않은) 커피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작금에는 편의점이 일정 부분 카페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편의점이 없었다면? 아침 운전 중 갈구하는 커피를 위해 굳이 어디선가 차를 정차하고 커피를 사던지, 아니면 카페인에 대한 열망을 꾹 참고 회사까지 와서 다시 커피를 사러 가던지 했을 테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로 시작한 이 글은 커피, 원두, 카페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 우리 주변에서 가장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편의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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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한국의 편의점 역사도 그리 짧은 편은 아니다. 우리들 옆에 24시간 환하게 불을 밝히는 편의점이 자리하기 시작한 건 1989년부터다. 해외 라이선스 계약으로 들여온 세븐일레븐이 시초였다. 나의 경우 편의점이라는 공간 자체를 인지한 건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1992년부터였다. 편의점은 참 신기한 곳이었다. 일찌감치 문을 닫는 동네 슈퍼의 심야 대안이랄까? 그때만 해도 패스트푸드점에서나 마시던 탄산음료 기계가 있었고, ‘슬러시’라는 얼음을 갈아 만든 음료가 굉장히 유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삼각김밥과 컵라면이라는 훌륭한 한끼 대안도 있었다.
오랫동안 편의점은 우리 곁에 있었다. 대형 마트나 슈퍼마켓에 비하면 가격이 조금 높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물품을 즉각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까지의 편의점은 생필품을 24시간 구매할 수 있는 편리한 장소로 인식된 개념이 컸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음식을 팔아왔지만 그들 고유의 음식이기보다는 이미 완성되어 납품되는 상용 제품들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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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그런데 편의점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티 라이프의 상징과도 같았던 편의점이 이제는 완전한 도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무엇 때문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최초 탄생한 편의점 개념이 현대의 ‘편의점’으로 뒤바뀐 계기인 일본 편의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팬데믹, 편의점의 진화를 가져오다
검색 사이트에 ‘일본 편의점’ ‘도쿄 편의점’ 등의 검색어를 넣으면 무수한 관련 텍스트 및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일본 여행을 가는 이들에게 ‘일본 편의점에서 꼭 사야 하는 것들’ 리스트는 필수 준비물이 되어버렸다. 그중 대부분이 먹는 음식과 관련이 있다. 나 역시 일본 여행 혹은 출장을 가면 하루에 한두 번은 꼭 편의점에 들른다. 계란 샐러드를 곱게 갈아 넣은 샌드위치, 손바닥 만한 유부가 들어있는 컵라면, 편의점에서 직접 조리하고 있는 어묵과 치킨, 와사비의 매콤함이 첨가된 스낵 등이 바로 구매 목표다. 이렇게 한아름 편의점 쇼핑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 그것들을 음미하는 게 일본 여행의 또 다른 재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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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이렇게 일본 편의점에 매료된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종종 불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왜 한국 편의점에는 일본 편의점처럼 다채로운 제품들이 없나?’ ‘한국 계란 샌드위치는 왜 일본 맛이 안 날까?’ ‘왜 일본처럼 다양한 컵라면이 없을까?’ 등등의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엔 이 같은 불평들이 해소될 만큼 한국의 편의점이 발전했다.
팬데믹이 가로막았던 지난 3년간, 한국 편의점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 이전부터 한국이 일본보다 더 앞선 편의점 음식이 있긴 했다. 바로 컵라면이 아닌 봉지 라면의 즉석 조리 시스템이다. 한강 고수부지 등을 거닐다 편의점에 들러 라면 하나 뜯어 은박 도시락 통에 담아 보글보글 끓여 먹던 경험을 다들 알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게 그나마 일본 편의점에 비해 우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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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나는 지난 3월, 3년 만에 도쿄를 다녀왔다. 어김없이 편의점에 들렀다. 팬데믹이 그었던 경계의 세월 때문일까? 물론 과거의 일본 편의점의 추억을 떠올려 이것저것 쇼핑을 했지만, 내가 사는 서울의 편의점이 과거에 비해 뒤쳐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주변의 편의점이 도시의 변화를 잘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편의점은 급하게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 시간 제한 없이 들를 수 있는 곳이면서도, 하릴없이 편의점에서만 파는 어떤 물건을 ‘겟’하기 위해 서둘러 입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1인 맞춤, 접근성, 가성비…편의점의 경쟁력
이와 같은 한국 편의점의 급속한 변화 사례로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가격 경쟁력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 편의점은 무조건 비싸다는 인식이 있었다. 여전히 비싼 건 맞다. 대형마트에서 대량으로 사야 하는 것에 비하면 단품으로 구매해야 하는 소비자 가격이 높은 게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이 더 쌀 때도 있다. 일종의 ‘1+1’ ‘2+1’과 같은 행사 제품이 그 예다. 마트에서는 하나에 1000원이고, 편의점은 1500원인 상품이 있다고 치자. 단일 비교에서는 50%가 비싸다. 하지만 ‘1+1’이 되면 되려 50%가 저렴해진다. ‘2+1’이면 약 30% 정도 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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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주영 |
둘째, 편의점에는 1인 가구를 충족시키는 소량 제품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혼자서 자취 중인 집에서 오일 파스타 요리를 한다 치자. 마늘이 꼭 필요한데, 다른 곳에서는 큰 봉지째 구매해야 한다. 아주 조금만 사용할 건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편의점에는 한 10알 정도 되는 깐 마늘을 판다. 개당 단가로 치자면 비싸지만 추후 사용할 일이 적다는 걸 생각하면 더 경제적이다. 더욱이 한국 편의점 도시락 수준이 꽤나 높아졌다. 이건 과거와의 상대적 비교다. 도시락은 어디에서 만드냐,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가격이 책정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과거 편의점의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운 도시락 퀄리티에 비해 현재에는 눈에 띄게 품질이 좋아졌다는 의미다.
셋째, 편의점에서만 살 수 있는 독특하고 차별화된 아이템이 있다. ‘연세우유 생크림 빵’ 같은 제품이 대표적이다. SNS에서 얼마나 실속 있는 음식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제품 단면 사진 포스팅이 유행한 적이 있다. 빵 속에 우유 생크림이 가득 찬 이 제품의 구매 후기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물건이 입고되는 시점에 곧장 다 매진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한 제품이었다. 더욱이 대학 이름이 붙어 있는 제품이 인기를 끌자 실제에서 흥미로운 대회로 잘 알려진 ‘연고전’을 연상케 하는 후속 제품들이 등장했다. 연대빵의 대항마로 고대빵이 나온 거다. 한 편의점 체인에서 이 같은 시도를 하자 새로운 시대의 소비자들은 꽤나 흥미롭게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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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GS25 김창수위스키 스페셜 (우)CU 김창수 위스키 |
또 다른 차별화 아이템 중 하나는 위스키를 포함한 술 제품이 아닐까 싶다. 최근 들어 위스키 품절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싱글 몰트를 포함한 숙성 위스키는 보통 8년에서 30년 가까이 오크통 속에 담겨 있다 제품화된다. 그 시절에는 많이 만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위스키가 이렇게 각광받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무튼 그 오크통들에서 꺼낸 위스키 공급량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수요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품절 대란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치열한 위스키 획득 전쟁 속에서 한 편의점 체인은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에서 소량으로 편의점에서 발매한 ‘김창수 위스키’를 구매하기 위해 오픈런을 하는 기현상까지 만들어냈다. 한 뉴스에 따르면 편의점 판매가 22만5000원이었던 제품의 가격이 (술을 온라인 상에서 판매, 재판매를 하는 행위는 불법이지만) 10배 이상 올라 거래되기도 한다고 했다. 한때 또 다른 오픈런을 발생시켰던 뮤지션 박재범의 소주 브랜드 ‘원소주’가 편의점 판매용으로 생산했던 ‘원소주 스피릿’도 그와 같은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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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포토파크 |
편의점이 더 발전하고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접근성이다. 전국 어디에서든 어지간하면 도보 10분 이내로 편의점에 다다를 수 있다. 도서산간 지방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편리한 접근성은 점차 편의점 자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대형 마트는 작정하고 가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편의점은 하루에 몇 번이고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유 하나 사러, 빵 하나 사러, 음료수 하나 사러 들르는 곳이라는 말이다.
접근의 편리는 곧 소비자 범위의 확장을 뜻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지갑을 열게 되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마케팅 전략상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흥미롭고, 색다르고, 독창적이며, 가격 경쟁력을 구비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바로 우리 시대의 편의점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이다.
편의점, 도심 속 소비자 친화의 현대적 공간
다시 한번 과거의 편의점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는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 들르는 소비자의 비중이 많았다. 급하게 면봉, 치약, 칫솔, 샴푸 등과 같은 제품을 사기 위해 편의점 한 번 안 가본 사람 없을 테다. 하지만 이제 그 생필품 판매는 올리브영과 같은 또 다른 프랜차이즈가 더 좋은 경쟁력을 구비, 편의점은 대부분 먹고 마시는 걸 위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더욱이 현대의 편의점에는 구매한 음식을 시식할 수 있는 공간들을 제공하고 있다. 커피 한 잔을 사더라도 앉아서 상대와 대화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니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식당 혹은 카페 공간의 역할마저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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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의 메뉴도 고급화되고 있다. |
나는 대략 6~7년 전 용산구 이태원의 경리단길 언저리에 살았었다. 그 길 중턱에는 꽤나 큰 편의점 하나가 있었다. 편의점 외부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밤낮 할 것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 그곳에서는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다(편의점 내부에서 음주하는 건 불법이다). 후에 들어보니 그 편의점에서 팔리는 와인 매출이 전국 편의점을 통틀어 1위라고 했다. 여기에서 경리단길 중턱 편의점의 장점이 도출된다. 바로 화장실이 실내에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
어쩌면 한국 편의점에 이 편의성이 추가된다면 많은 부분의 확장이 보장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마침 이 원고를 작성하는 시점에 TV 프로그램에서 일본 편의점을 다루는 걸 봤다. 패널로 등장한 일본인 출연자가 한 말이 꽤 기억에 남는다. “일본 편의점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라는 것. 이제 편의점이 먹고 마시는 공간의 역할까지 대행하고 있다면 추가되어야 할 필수적 옵션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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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Unsplash(Chase Yi) |
오늘도 나는 몇 차례 편의점을 들를 것이다. 출근길에 이미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려왔지만, 갑자기 필요한 물품이 있어 편의점에 갔었다. 벌써 두 번이나 들렀다. 점심 식사 후에는 군것질거리를 좀 사러 들를 것 같고, 집에 가기 전에는 우유 한 통을 사서 갈 생각이다. 이렇게 오늘만 해도 네 번이나 편의점에 들른다. 아, 송구하게도 난 전자담배 흡연자다. 이게 떨어지면 더 수시로 그곳에 가야만 한다. 이게 비단 나에게만 발생하는 현상일까? 아닐 거다. 작금의 현대인이라면 편의점은 그 어떤 곳보다 더 많이 들르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이제 만 3살인 아들도 편의점이 보이면 꼭 그곳에 들르자고 떼를 쓴다. 함께 입장하면 편의점 전면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춰 젤리, 카라멜, 사탕 등이 진열돼 있다. 그중 하나라도 집어 들지 않으면 아이는 성에 차지 않은 듯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다. 학원 혹은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도
참새 방앗간처럼 편의점에 우르르 몰려드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만큼 우리네 삶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현대적 공간이 바로 이 시대의 편의점이다. 동시에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시티 라이프의 최전선이다.
[글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언스플래시, 픽사베이, 이주영]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8호(23.5.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