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오직 이 순간만 있을 뿐
히치하이킹 여정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방향은 여행자가 정하지만 그 방향까지 함께 동행할 누군가가 나타날지, 나타난다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목적지까지 몇 ㎞에 불과하지만 그곳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다가올 불확실한 어떤 순간을 예측하고 바라고 생각하기보다 지금 당장 이토록 확실함을 즐기는 데 집중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엄지를 들고 섰던 매 순간의 가르침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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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브라니카산 정상에서 바라본 호수. 이번 히치하이킹 여행의 동행자인 친구 스와미Swami가 앉아 있다. |
하나뿐인 옵션이 ‘꽝’이 되는 순간
알바니아에서의 첫날밤은 텐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모처럼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싶었고, 빳빳한 하얀 천으로 단장된 침대 위에 깨끗이 씻은 몸을 누이고도 싶었다. 하지만 알바니아 남부 블로러주에 속해 있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 자라Xarrë에는 숙박시설이 하나뿐이라 선택지랄 것도 없었는데, 그런데 그 하나뿐인 옵션이 불가능해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굳게 닫힌 숙소의 문을 재차 두드려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 낯선 이방인의 존재가 동네방네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우리를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서 2~3㎞ 내려가면 아랫마을에 숙소가 하나 있어요. 식당도 있고요.”
“거기도 숙소가 하나뿐일까요?”
“네.”
“식당도 하나뿐일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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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숫가 근처에서 보낸 알바니아에서의 첫날밤 |
별 시답잖은 질문이네, 하나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하냐는 여러 의미가 ‘네’에 섞여 있었다. 한 가지 상황을 두고 여러 방향에 맞춰 미리 예측하고 따지고 감안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현대인인 내가 대화를 이쯤에서 끝낼 순 없었다.
“아랫마을에 갔는데 그 숙소도 문을 닫았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죄송하지만 그곳 연락처를 아시나요? 지금 운영하고 있는지 전화해서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저 사람이 아랫마을에 사는데 지금 집에 간대요. 저 사람 차 타고 가서 영업하는지 확인해봐요. 여기서 금방 가요. 5분도 안 걸려요.”
아무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아랫마을 사람의 차를 타고 순순히 시골마을의 법을 따르면서 헛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도시 사람이 이토록 예측 불가능한 히치하이킹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아랫마을 숙소 역시 운영하지 않았고 다행히 식당은 여행자를 위해 존재했다. 샤워와 침대 대신 고기로 실컷 배를 채운 뒤 식당 주인이 추천한 호숫가 근처에 텐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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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마을 하나뿐인 식당에서의 저녁식사 |
낯섦이 인연과 경험으로 완성되기까지
알바니아행은 순전히 내 생각과 욕심, 호기심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이번 히치하이킹 여행의 동행자인 친구 스와미Swami가 그리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 즉 알바니아를 포함해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중 원하는 곳을 밝히는데 주저했기에 내 뜻을 관철하는 건 아주 쉬웠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었다 해도 결과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알바니아 땅에 두 발자국을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게다가 최종목적지인 서유럽까지 가려면 알바니아를 통과하는 것이 이론상 가장 효율적인 동선이었으니까.
안디Andi는 몇 해 전 동티모르를 여행하다 우연히 만난 알바니아 사람이다. 알바니아 토박이인 그의 아내가 강력 추천한 블루 아이Blue Eye까지 가는 길은 꽤 복잡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복잡하더라도 무조건 그곳에 가야 했다. 그녀가 말한 파란 눈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에. 여행지에서 알바니아 사람을 만난 건 인디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남유럽 사람은 사실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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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 사람 안디가 추천했던 블루 아이 |
안디는 아내와 함께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거주하며 S전자에 근무하는 잘 나가는 엔지니어였다. 처음 만났을 때 ‘한국 어느 도시에서 사느냐’는 내 질문에 대뜸 서울이 아닌 ‘강남’이라고 과시하듯 답을 하는 그의 첫인상이 살짝 재수 없게 느껴졌었는데, 어느 정도 대화를 하고 보니 그의 넘치는 자신감이 근거가 아주 없진 않았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동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대학 졸업장을 따낼 만큼 명석한 두뇌를 자랑했다는 그는 소위 성공한 ‘흙수저’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 나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린 그가 겪어온 사회적 배경은 분명 내가 겪지 않은 과거의 어느 한 지점과 맞닿아 있었다. 그것에서 호기심이 발동했고, 그때부터 알바니아 여행을 막연히 꿈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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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숫가 근처에서 보낸 알바니아에서의 첫날밤 |
시골마을에서의 히치하이킹은 하면 할수록 ‘인내심’을 키워주는 것 같다. 알바니아 시골마을은 인적도 차량도 그 수가 매우 드물어 소름 끼치게 기나긴 정적이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랜 정적을 깨고 차량이 나타날 때면 동행 여부를 떠나 운전자 모두 우리 앞에 차를 세운 뒤 여행자의 안위를 살폈다는 점이다.
우리의 안위뿐 아니라 동행까지 허락한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SH98 도로를 따라 쉬칼레Shkallë까지 한 번, SH97 도로를 따라 크라나Kranë까지 두 번, SH99 도로를 따라 목적지 블루 아이까지 세 번. 쉬칼레에 사는 중년남성 운전자에서 쉬칼레에 사는 노년 부부의 차량으로, 그리스에서 온 여행자 커플과의 동행을 마지막으로 이날의 인내심 키우기는 일단락되었다.
토박이의 말 따라 파란 눈을 보았다
믿을 수 없는 타원형 모양의 담수 온천, 중앙의 진한 파란색과 측면의 하늘색이 공존하는 마치 사람의 눈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파란 눈’, 블루 아이. 자연의 지질 현상은 매우 깊은 샘물 웅덩이를 형성하였고, 50m 깊이의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구조를 만들었다. 총 25㎞, 18개의 물 웅덩이는 비스트리체Bistricë 강에 물을 공급하며, 1958년 지어진 인공수로를 통해 이오니아 해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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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샘 주변을 둘러싼 초목이 비밀의 정원 같은 블루 아이 3 사람의 눈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블루 아이 |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맑은 물과 매혹적인 색상 때문에 알바니아의 신비이자 보물이라 불리는 이곳. 수온 섭씨 10~13도의 천연 온천치고는 매우 차가운 파란 눈의 온도. 실제 피부에 느껴진 온도는 금세 온몸 전체에 소름을 불러 일으킨다.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드는 냉탕에서의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어쩌면 그 한 번도 불필요한 경험이었을지 모르겠다.
얼음장 같이 차디찬 블루 아이에 몸을 맡긴 건 참 훌륭한 경험이었다. 딱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 결과 얻게 된 몸살감기는 이런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몸에서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은 채 며칠의 여정과 몇 번의 이동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는 감기가 밉고 아프고 괴로웠다. 며칠 새 심신이 감기에 완전히 정복된 데다 서울에서의 업무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지면서 일단 ‘한국행’으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수도 티라나Tiranë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이틀의 시간이 남았고, 남부에서 티라나까지는 약 300㎞ 남짓 거리다. 이동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해서 이동수단까지 바꿀 필요는 없었다. 히치하이킹은 계속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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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눈에 몸을 담근 사람들 |
SH4 도로를 따라 지로카스터르Gjirokastër 주변 도시로 간다는 차량에 재빨리 올라타고 난 뒤 운전자, 동승자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와 중년의 딸, 10대 손녀까지 모두 여성이다. 지금껏 현지인 남성운전자 혹은 부부나 남녀가 탄 차량이더라도 운전자는 모두 남성이었던 터라 낯선 여행자를 태운 ‘신여성들’의 입장과 생각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손녀의 자연스럽고 능숙한 영어실력이 엄마와 할머니, 여행자 사이를 오가며 대화를 이끌었다.
“사실 엄마는 모르는 사람들이니 태우지 말고 그냥 가자고 단호히 말했어요. 근데 제가 졸랐죠. 우선 이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묻기만 하겠다고요. 그리곤 또 졸랐죠. 방향이 같으니 그냥 차에 태우자고요. 엄마가 당신들이 둘 다 남자였으면 내가 아무리 졸라도 차를 멈추지 않고 그냥 갔을 거래요. 둘 중 한 명이 여자라서, 게다가 외모가 아시아 여성 같아서 태운 거래요. 엄마가 아시아 문화를 좋아하거든요. 특히 한국 드라마를요. 저는 K팝, 아이돌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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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로카스터르 마을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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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로카스터르 마을 전경 |
도로 위에서 엄지를 들고 있던 아시아 여성이 마침내 한국인으로 판명이 나자 엄마도 딸도 곧장 여행자로 옷을 갈아 입는다. 그리곤 TV나 유튜브와 같은 가상공간이 아닌 실제 한국인과 함께 한국으로 간접 여행을 떠난다. 낯설고 위험하다 생각했던 순간이 특별한 인연과 경험으로 완성되며 차량 내부에선 낯설고도 특별한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 국적도 성별도 다른 서로의 낯섦이 한 차량 안에서 만나 어우러지며 히치하이킹의 의미와 가치는 그렇게 또 새로 쓰여졌다. 여행자, 운전자 모두에게.
사라예보에서 다시 엄지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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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칸서부에 주요 통로에 위치한 지로카스터르 성곽 2 지로카스터르 중심가 |
한국행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친구 스와미를 다시 만났다. 나는 한국의 서울에서, 스와미는 크로아티아의 한 시골마을에서 각자 정해진 일정을 소화한 뒤 약 한 달 만에 우리는 다시 도로 위에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일단 수도 사라예보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간다. 북쪽으로 뻗은 메인 도로가 E73과 M5 두 개인데, 그중 가능하다면 M5 도로로 가는 운전자 차량에 탑승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꼭 방문하고 싶은 단 하나의 목적지, 프로코스코 호수Prokoško Lake에 가려면 M5 도로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E73 도로를 타게 된다면 이동시간은 더 많이 소요되겠지만 그렇다고 호수에 갈 수 없는 상황까진 아니다. 시간 싸움일 뿐, 어디를 가더라도 길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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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코스코 호수까지 동행한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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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와미(좌측)와 프로코스코 호수까지 히치하이킹으로 동행한 사람들 |
발칸반도에서 가장 변방으로 통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과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공화국 가운데 하나에 속했던 이 나라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와중에 독립을 쟁취했다.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3대 민족집단으로 구성된 데다 각각의 민족에 따라 이슬람교, 그리스정교회, 가톨릭까지 다양한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이 특징.
또한 국경선의 대부분이 크로아티아에 둘러싸여 있으며, 아드리아 해에 접한 해안선이 20㎞에 불과해 내륙국이자 평균 해발고도가 1000~1700m에 이르는 전형적인 산악국 특색을 보인다. 해발 1670m에 자리한 프로코스코 호수는 산악국의 특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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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프로코스코 호수 마을 사람들 5 목축업이 호수 마을의 주요 수입원이다. 6 사라예보 도심 전경 |
사라예보 외곽에서 호수까지는 약 90㎞, 차로 2시간이면 닿는 거리. 늦은 오후에 시작된 히치하이킹은 비소코Visoko까지 가는 현지인 운전자를 어렵사리 만나면서 결국 E73 도로 위를 달린다. 더 기다려서 다른 운전자를 만나 M5 도로를 탄들, 비소코에 간 다음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들 어차피 시계바늘은 째깍째깍 쉬지 않고 돌아간다.
날도 저물고 차량도 드물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비소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다음날 오후 프로코스코 호수에 닿기까지 꼬불꼬불 좁다란 산길을 따라 이 차, 저 차를 거치며 이동이 어지럽게 이어졌다.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 자연스레 푸념은 사라졌지만 이럴 땐 선택지랄 것이 없어서 운전자에게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뭔가 자유를 뺏긴 것 같은 심정이 동반된다. 역시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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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670m에 자리한 프로코스코 호수 마을 전경 |
브라니카Vranica산에 자리한 프로코스코 호수는 길이 426m, 너비 191m, 최대 깊이 13m로 조성되어 있다. 높은 고도의 기후조건과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간주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골마을은 자연 애호가를 위한 이상적인 하이킹 목적지로 유명하다. 마을을 거닐며 작은 목조 양치기 오두막의 건축물을 감상하거나 브라니카 등산로를 통해 하이킹을 하며 설산의 풍경을 만끽하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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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670m에 자리한 프로코스코 호수 마을 전경 |
즉흥적인 여행을 지나 마침내 국경으로
이제 목적지는 하나다. 계속해서 북쪽으로 이동해 국경을 넘는 것. 하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땅을 떠나는 날이 오늘 당장이 될지 며칠이 걸릴진 알 수 없다. 일정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북쪽으로 이동하며 만나는 현지인 운전자의 의견에 따라, 도로상황에 따라 가능하다면 여유 있게 주변장소에 들러 관광을 즐기기로 했다. 즉흥여행처럼.
즉흥여행 속 즉흥여행을 위해 첫 번째 들른 곳은 야이체Jajce다. 7000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중심부에 자리한 폭포와 요새, 호수 등이 규모에 비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 현지인 운전자의 설명이었다. 15세기 보스니아 왕국 시대 야이체는 핵심 도시로 군림했다.
구시가지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중세 요새는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15세기 초 보스니아 왕실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는 방문객을 위해 개방되어 있으며 성벽 산책로를 따라 내려다 보는 전망이 마치 동화 같은 모습을 풍긴다. 요새만큼이나 유명한 21m 높이의 플리바 폭포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경관 중 하나로, 매년 여름이면 폭포에서 다이빙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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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5세기 초 보스니아 왕실 거주지로 사용된 야이체 요새 2.휴식과 캠핑의 최적지, 플리브코 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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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와미(좌)와 산스키 모스트까지 동행해준 사람(우) |
두 번째 즉흥여행은 산스키 모스트Sanski Most에서 멈췄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서부의 사나 강 유역에 자리한 작은 마을의 한 시골집에서 농장 스테이를 경험했다. 산스키 모스트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3㎞ 떨어진 외딴 곳에 독일인 커플이 운영하는 농장과 집이 위치하는데, 이곳은 인근 마을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교육 지원 등의 사업을 한다. 여러 비정부기구가 지역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산스키 모스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료, 사회, 심리, 문화 등의 치료 지원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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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이체에 위치한 21m 높이의 플리바 폭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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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이체에 위치한 21m 높이의 플리바 폭포 |
또 다른 즉흥여행은 우나 강과 인접한 오스트로자크Ostrožac에서 출발한다. 218㎞ 길이의 우나 강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에서 찾는 봄철 래프팅 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우나 강의 물줄기를 따라 급류에 보트를 싣고 그 속에서 스릴과 스피드를 만끽하는 모험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훌륭한 선택 같았다. 모험을 시작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래프팅 시작지점인 우나 강 상류로 이동해 그곳에서 같이 보트에 탑승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한 IT회사 소속 직원들로 단체 워크숍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회사의 소속인 양 이들 무리에 껴서 래프팅을 즐겼는데, 이후 이들의 초대로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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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산스키 모스트에서의 농장 스테이 (아래)래프팅과 회식을 함께한 크로아티아 사람들. 노란색 가디건을 입은 사람이 필자다. |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한 무리의 직원들까지 합쳐지며 워크숍 인원수는 점점 늘어났고, 뜻밖에 벌어진 이들과의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부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총출동한 ‘회식’ 풍경 그 자체였다. 게다가 회식이 끝나고 난 뒤 자그레브로 돌아가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와의 동행을 먼저 반겼다. 식당에서 자그레브까지 약 150㎞ 거리, 도로 위에 설 필요도, 엄지를 들 필요도 없이 다소 긴 거리를 한번에, 그것도 수월하게 국경
을 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성대한 회식에 안전한 귀가서비스까지, 저녁을 먹으며 홀짝홀짝 들이킨 술보다 직원을 위한 특급 복지서비스에 거나하게 취한 밤. 이들의 환대 덕분에 자정 넘어 국경도 넘었다.
* 유럽 히치하이킹 여행 마지막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