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예능에서 스크린까지 휩쓸며 대중문화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장르가 있다. 바로 스포츠다. 극본 없는 영화처럼, 완성되지 않은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성장하는 스토리가 사람들에게 매력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 같은 스포츠 콘텐츠가 침체된 한국 영화계를 살릴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해당 기사에는 일부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지난 1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가운데 서울의 한 멀티플렉스 포토월(사진 매경DB) |
지난 1월4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최근 아이맥스(IMAX) 포맷으로 관객을 만나며 누적관객수 445만 명(기사작성일 2023년 4월12일 기준)을 기록했다. 한국 극장가가 전반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장기적인 흥행 저력은 눈에 띄는 현상이다. 이 같은 흥행에는 절대적 팬덤층인 3040 남성 세대의 지지와, 입소문을 통해 새롭게 유입된 2030 여성 관객층의 합류가 있었다. 그들은 30년 만에 돌아온 추억의 작품에 극장가로 소환되었고, 깊어진 스토리 구성, 세밀한 작화와 CG 등이 더해진 높은 퀄리티로 ‘N차 관람’ 열풍을 이끌며 올해 최고 흥행작으로 우뚝 섰다.
무엇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세대를 넘나드는 인지도와 대중성을 갖춘 것은 ‘스포츠’ 장르라는 것도 한몫했다. 이에 힘입어 올해 상반기 스포츠 영화 개봉작들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판 슬램덩크’라는 평을 받고 있는 영화 <리바운드>(4월5일 개봉)는 농구선수 출신 공익근무요원 ‘양현’(안재홍)이 해체 위기에 놓인 부산중앙고 농구부의 신임 코치로 발탁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2012년 전국 고교농구대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최약체 농구부의 신임 코치와 6명의 선수가 쉼 없이 달려간 8일간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그린 감동 실화다. 많게는 십수 명의 엔트리를 가진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 단 6명의 선수만으로 대회에 출전한 부산중앙고는 본선에 올라 무서운 돌풍을 일으켰다.
주목받던 천재 선수였지만 슬럼프에 빠진 ‘기범’, 부상으로 꿈을 접은 ‘규혁’, 점프력만 좋은 축구선수 출신의 괴력 선수 ‘순규’, 길거리 농구만 해온 ‘강호’, 농구 경력 7년 차 만년 벤치 ‘재윤’, 농구 열정 만렙인 자칭 마이클 조던 ‘진욱’까지, 영화는 절대 한 팀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들 6명의 선수와 신임 코치 양현이 하나로 뭉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리바운드>는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수리남>의 권성휘 작가가 각본, <킹덤>의 김은희 작가가 각색해 만들었다. 영화는 소위 말하는 ‘스포츠 영화 법칙’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주인공 팀의 열악한 환경, △사연 있는 감독, △패배로 인한 성장, △승리보단 성장에 주목할 것(-참고 기사: 전자신문 ‘스포츠 소재 영화의 법칙 다섯! 이런 경우 꼭 있다’, 2016.04.26, 조정원 기자)이 그것이다.
거기에 더해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실화 기반의 영화 줄거리는 어쩌면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리바운드>와 같은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고, 관객들이 발걸음을 이어지게 하는 것은, 스포츠라는 콘텐츠와 그 속에서 탄생하는 감동 요소가 어느 때건 꼭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 영화 <리바운드> 포스터(사진 바른손이앤에이) |
↑ 영화 <리바운드> 스틸컷(사진 바른손이앤에이) |
영화 <에어>(4월5일 개봉)는 스포츠 용품 브랜드 나이키와 에어 조던 브랜드의 시작인 농구화 ‘에어 조던’의 탄생 비하인드를 그린 실화 기반의 영화다. 1984년, 컨버스와 아디다스로 나뉘던 스포츠 용품 시장에서 후발 주자였던 나이키는 브랜드 간판이 되어줄 새로운 모델을 찾는다. 나이키의 스카우터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는, 당시 신제품 마케팅을 위해 NBA 신인 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을 발탁하자고 주장한다.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그와의 계약을 노리고 있었고, 마이클 역시 나이키에는 관심이 없는 상황. 이에 소니는 나이키의 마케팅 부서 임원 ‘롭 스트라서’(제이슨 베이트먼), 농구화 부서 임원 ‘하워드 화이트’(크리스 터커), 디자이너 ‘피터 무어’(매뉴 마허), 그리고 나이키의 CEO ‘필 나이트’(벤 애플렉)와 함께 조던을 영입하고자 힘을 뭉치고, (농구와 인원수까지 똑같은)나이키 팀은 필드 위는 아니지만 그들만의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팀플레이와 전략을 펼친다.
↑ 영화 <에어> 포스터(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마이클 조던과 농구, 또는 스포츠 마케팅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세기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농구화 브랜드 ‘에어 조던’을 만들기까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탄생 비화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80년대, 아디다스와 컨버스가 대표적이었던 스포츠 용품 업계에서 나이키는 후발 주자 브랜드였다. 일부 사업에서 부진이 이어지던 가운데, 농구화 부서 역시 성공 가능성이 확실치 않던 상황. 그러던 중 나이키는 ‘에어 조던’을 선보이며 차별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영화 <에어>는 ‘에어 조던’의 탄생까지의 과정 속, 실질적인 키를 쥐고 있던 인물들을 조명한다. 그를 통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
영화에서 나이키 팀과 마이클 조던의 미팅 날, 소니는 마이클 조던에게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지만 당신은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고, 찬양하는 사람들 뒤로 끌어내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결국 모두 이겨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해당 장면은 영화적 요소에 가까운 픽션이지만, 결과적으로 관객들은 마이클 조던의 순탄치만은 않은 여정을 알기에 더욱 공감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NBA 은퇴 후 지금까지도 마이클 조던은 세계적인 농구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고, 에어 조던은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됐다. “그(마이클 조던)의 이야기가 모두를 날아오르게 할 거예요.” 영화 속 주인공 소니의 대사가 오랜 기억에 남는다.
↑ 영화 <에어> 스틸컷(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 영화 <카운트> 포스터(사진 CJ ENM) |
↑ 영화 <드림> 포스터(사진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상반기 개봉 예정인 스포츠 영화들은 농구, 복싱, 배구, 축구, 마라톤 등 종목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리바운드>와 <에어>처럼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들의 출격도 이어질 예정이다. 지난 2월에 개봉한 영화 <카운트>는 복싱 금메달리스트 출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마이웨이 선생 ‘시헌’(진선규)이 오합지졸 제자들을 만나 세상을 향해 유쾌한 한 방을 날리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복싱 금메달리스트 박시헌 선수의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오는 4월26일 개봉 예정인 <드림>은 선수 생활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소울리스 축구 선수 ‘홍대’(박서준)가 홈리스 풋볼 월드컵 감독으로 재능기부에 나서며, 집 없는 오합지졸 국대 선수들과 함께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극은 2010년 브라질 홈리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에 이어 올해 개봉을 앞둔 <1승>은 인생에서 성공을 맛본 적이 없던 배구감독이 단 한 번의 1승만 하면 되는 여자 배구단을 만나면서 도전에 나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우 송강호와 박정민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으며, 제52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최초 상영되었다. 올해 9월 개봉 예정인 <1947 보스톤>은 강제규 감독, 배우 하정우, 임시완을 주축으로 한 영화로, 광복 후 태극기를 달고 보스톤 국제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한다.
↑ 영화 <리바운드> 스틸컷(사진 바른손이앤에이) |
영화 <리바운드>는 극 마지막 부분에서 부산중앙고와 용산고의 결승전이 펼쳐진다. 6명의 선수로 결승전까지 올랐지만 1명은 부상당해 출전이 어려운 상황. 결과적으로 코트 위 5명의 선수 중 2명이 5반칙으로 퇴장하게 되고, 3명의 선수만이 끝까지 코트를 지키게 된다. 영화 말미, ‘양현’이 선수들에게 건네는 이야기 중 “명심해라. 농구는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는 대사가 있다. 그 역시도 결과가 뻔히 보이던 경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의 노력에 따라 기회를 다시금 만들 수 있다(‘리바운드’)고 믿는 것, 그 투혼 끝에 그들의 여정은 준우승으로 마감한다.
영화는 준우승에 대한 아쉬움 대신 감독과 선수가 함께 성장하고, 뭉치게 된 과정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를 통해 관객들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라는 유행어를 떠올린다. 한국 축구 사상 역대 세 번째 16강에 진출한 ‘2022 카타르 월드컵’ 태극전사들을 대표하는 단어 ‘중꺾마’는, 프로게이머 ‘데프트’의 인터뷰 기사 제목에서 유래된 말이다(참고 기사: 쿠키뉴스 ‘DRX 데프트 “로그전 패배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영상’ 2022.10.9, 문대찬 기자). 그리고 이어진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해당 문구가 새겨진 태극기를 들며 더욱 더 화제가 되었다. 이처럼 영화 같은 스포츠 경기와,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팬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다. 최근 일부 스포츠 업계에서 발생한 반갑지 않은 이슈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 3월 초 열린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한국 대표팀은 1라운드에 탈락하며 아쉬움을 자아냈고, 지난 4월 대한축구협회는 승부 조작 축구인 기습 사면으로 인해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옛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스포츠 영화의 연이은 개봉 소식과 ‘중꺾마’ 정신이 돋보이는 것은, 스포츠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에 대한 경각심이 아닌, 스포츠에서 승패에 휘둘리기보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기회를 만들어가는 이들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2022 카타르 월드컵’과,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배구대표팀처럼 메달을 따지 못해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최근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에 이어,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는 유행어까지도 생겨나고 있다. 승리에
사진: 매경DB, NEW, 바른손이앤에이,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넷플릭스, 각 영화 스틸컷
[글 시티라이프부 이승연 기자(lee.seungyeon@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6호(23.4.2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