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 지도상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 모양 같다고 해서 ‘인도양의 눈물’이라 불리는 그곳에 발을 들였다. 미지의 섬나라엔 소문대로 신기하고 특별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마주치는 아름다운 자연과 찬란한 해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대 도시와 사원, 홍차의 나라임을 입증하는 고지대 마을과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서부와 중부, 남부를 차례로 여행했다.
↑ 네곰보 해안 전경 |
1인 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은 해가 지고 난 뒤 낯선 나라에 발을 들여야 할 때다. 방콕발 콜롬보행 비행기의 기나긴 숨 고르기는 전광판에 쓰인 숫자를 두어 번 갈아치우고 나서야 마침내 출발신호를 알렸다. 1시간 30분의 태국과 스리랑카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아무리 이리저리 계산을 때려봐도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을 피할 길이란 없었다. 낮과 밤을 바꾸는 일, 신이라면 몰라도. 이 상황에서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건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재빨리 플랜B로 갈아타는 일이다. 예상대로 반다라나이케(Bandaranaike) 국제공항은 깜깜한 배경으로 여행자를 맞았다.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공항에서 가까운 네곰보(Negombo)행 플랜B가 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나 어둠 속에서의 이동은 최소화하는 것이 안전하다. 공항에서 불과 10㎞ 떨어진 소박한 해변 마을로 간다.
↑ 서부 해안에 위치한 네곰보 해변과 마을 전경 |
네곰보는 스리랑카 서부도시 중 수도 콜롬보 다음으로 큰 도시다. 서해안에 위치한 지리적 장점 때문에 어업이 번창한 도시로 군림했다. 역사적으로 7~8세기경 동서 무역로를 장악한 무슬림 아랍인이 네곰보에 정착해 계피 무역을 시작하며 이 도시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계피는 세계 최고로 인정받았는데, 그중 가장 귀한 품종이 네곰보를 따라 뻗어 있는 해안에서 생산되었다. 대부분의 전쟁과 역사가 서로의 것을 뺏고, 빼앗기는 다툼에서 시작되듯 네곰보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1500년대 초 아랍인에게 세계 최고 계피를 뺏는데 성공한 포르투갈인, 이후 1644년 네덜란드인이 이를 다시 빼앗았다. 그 다음 주인은 1796년 영국군이었다. 특히 포르투갈의 지배는 계피 생산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 당시 네곰보 곳곳에 가톨릭 교회가 세워지고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천주교로 개종이 활발히 이뤄지기도 했다.
버스와 기차역, 시장 등이 위치한 네곰보 중심지는 서쪽에 자리하지만 여행자를 위한 대부분의 숙박시설은 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해변가에 줄지어 있다.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를 막 끝냈을 시점이었는데, 내리쬐는 햇빛의 강도가 심상치 않았다. 스리랑카에서 건기 중에서도 가장 여행하기 좋은 1월의 날씨지만 오전시간임에도 한낮의 찌는 듯한 무더위가 이미 숙소 앞마당을 점령했다. 햇볕이 파라솔 우산을 뚫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갑작스레 닥친 이곳의 무더위에 적응하고 신체리듬을 회복하기 위해 로컬음식으로 몸보신부터 시작했다.
↑ 2,3 커리와 밥, 밑반찬으로 구성된 스리랑카 대표음식 |
스리랑카의 대표음식은 차림새만 보면 우리나라 가정식과 비슷하다. 찰기가 없는 삼바(Samba)나 카쿨루(Kakulu) 쌀밥에 각종 향신료가 들어간 커리와 밑반찬이 한 상 또는 한 접시에 차려져 나온다. 피시나 치킨, 채소 등 메인 커리 종류만 선택하면 나머지 밑반찬은 딸려 나온다. 밑반찬은 채소나 절임, 콩 등을 주된 재료로 여기에 다양한 향신료가 첨가되어 만들어진다. 그 맛이 제각기 독특해서 하나하나 맛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해가 지는 아름다운 네곰보 해변을 배경 삼아 즐기는 맛과 풍경이 낯선 나라로부터 여행자를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위장엔 여행할 용기가 쌓여 갔다.
“스리랑카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세계 최빈국에 속하지만 호텔이나 식당 등의 물가는 태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동남아국가와 비교하면 훨씬 비싸단 말이죠. 외국인을 상대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근데 시설은 열악해요. 관광산업이 스리랑카 국가경제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여행 인프라가 아주 지나치게 열악해요. 스리랑카가 1인 여행자에게 친절한 국가냐고 묻는다면 답은 ‘No’에 가까워요. 단, 한 가지만 빼고요. 이동을 돕는 로컬 버스나 기차만큼은 진짜 친절함이 도가 지나칠 정도예요. 이동 하나만큼은 정말 쉬운 나라예요. 그렇다고 교통수단이 최신 시설이라고 기대하진 마요. 이 나라에선 버스만 타면 어디로든 다 연결이 돼요.”
↑ 스리랑카의 주요 교통수단인 로컬 버스 |
네곰보 숙소에서 만난 캐나다 여행자가 먼저 스리랑카를 경험한 자로서 남긴 말이었다. 여행 인프라는 열악하나 이동은 쉬운 나라, 네곰보를 떠나 중부 역사유적지구로의 탐방을 시작하자 그녀의 말이 퍼뜩 와 닿았다. 스리랑카의 주요 교통수단인 SLTB(Sri Lanka Transport Board)는 약 7000대의 버스가 스리랑카 전역에서 운행되며, 대다수의 도시와 농촌지역, 마을을 연결한다. 화려한 그림과 컬러로 단장된 버스 내부에는 운전자를 포함해 최소 2명 이상의 안내원이 탑승해 버스표와 승객을 관리한다. 이들의 업무에는 행선지 안내도 포함된다. 안내원과 일단 말을 트고 나면 목적지까지는 문제없이 도달할 수 있다. 버스만 잘못 타지 않는다면. 혹여 잘못 탔다 해도 어느 지점에서, 어떤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지 안내원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친절한 설명이 뒤따른다. 마치 자신의 주요 업무라도 되는 것처럼.
↑ 담불라 고대 동굴 사원 내외부에 설치된 불상들의 모습 |
중부 마탈레 구 북쪽에 위치한 도시, 담불라(Dambulla)에 닿았다. 여행자건 현지인이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오직 동굴 사원 단지 때문이다. 평원 주변 160m 높이로 솟아 있는 이 단지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고대 건물에 속하며, 동상과 그림이 있는 5개의 동굴 사원이 위치해 있다. 2000년 전 이곳에 처음 불상이 만들어진 후 수세기에 걸쳐 왕의 지휘 아래 동굴 예술이 발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부처님의 삶과 관련이 있는 그림과 조각상, 약 150개의 불상과 스리랑카 왕의 동상, 신과 여신의 동상 등이 전 세계 방문객을 불러 모은다. 약 2100㎢의 넓은 면적에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이 장식되어 있는 동굴 벽화도 이곳을 대표 볼거리이다.
↑ 6. 사원 주변에서 마주친 원숭이 무리 7. 일출을 보기 위해 오른 피두랑갈라 바위 정상 8. 담불라 동굴 사원 외부에 설치된 불상 |
고대 도시 탐험은 담불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여㎞ 떨어진 시기리야(Sigiriya)에서 출발한다. 기원후 477년 시기리야는 남아시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도시 계획 사례이자 가중요한 고고학 유적지로 각광받았다. 정교한 궁전과 바위 위에 우뚝 솟은 건축물, 유려한 예술품은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스리랑카 국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고대 바위 요새이자 전 왕궁이었던 시기리야를 제대로 보려면 새벽 산행은 필수다. 일출 전 시기리야 바위 맞은편에 위치한 피두랑갈라(Pidurangala) 바위 정상에 반드시 올라야 한다. 길 따라, 사람 따라 1시간 정도 숨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또 오르면 시기리야 바위를 한눈에 조망 가능한 정상에 발자국이 찍힌다. 일출과 함께 구름이 걷히고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는 시기리야 바위, 고대 도시의 문이 여행자를 향해 열리는 순간 새 날, 새 아침을 맞는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시기리야 바위 |
스리랑카의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의 약 65% 정도 크기다. 비교적 작은 땅이지만 동서남북 지리적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기후를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서부와 중부를 여행하며 하루 종일 온몸을 감싼 찌는 듯한 무더위가 엘라(Ella)에선 감쪽같이 그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아침저녁 재킷과 두툼한 바지를 챙겨 입어야 할 만큼 서늘한 기온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해발 1041m 고도에 위치한 엘라는 안개 자욱한 초록빛 찻잎 나무 숲으로 뒤덮인 언덕에 둘러싸여 자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 여행 중 하나로 선정된 캔디(Kandy)발 엘라행 기차는 듣던 대로 고지대의 목가적인 풍경을 감상하기에 제격이었고, 창문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은 시골정취 가득 풍기는 친숙함을 자아냈다.
↑ 1. 고산지대에 자리한 엘라 기차역 2. 산 깊숙이 달리는 캔디발 엘라행 열차 3. 엘라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나인 아치 브릿지 4.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다리 위로 하루에도 여러 번 기차가 오간다. 5. 4륜 구동 지프차량을 타고 즐기는 사파리 투어 6. 스리랑카 코끼리의 중요한 서식지, 우다왈라웨 국립공원 |
랜드마크로 불리는 나인 아치 다리(Nine Arch Bridge) 감상이 엘라 여행의 시작이다. 1921년 완공된 이 다리는 금속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벽돌과 암석, 시멘트로만 지어져 당시 공학적 측면에서 높은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24ft(약 30.48㎝), 91m에 걸쳐 있는 이 다리 위로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하루에도 여러 번 기차가 오간다. 다리만큼이나 유명한 엘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하이킹이다. 여러 하이킹 코스 중에서 인기가 높은 곳은 단연 리틀 아담스 피크(Little Adam’s Peak). 봉우리가 훨씬 큰 아담스 피크(Adam’s Peak)의 동생 격인 리틀 아담스 피크 트레일은 난이도가 용이하고 정상까지 소요시간이 1시간 정도로 남녀노소 도전하기 쉬운 편에 속한다. 차 농장을 통과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엘라 바위까지 전망이 가능하다. 하루 중 어느 때에 올라도 고지대의 풍광은 그 모습 그대로 여행자를 반기지만 굳이 최고의 시간대를 꼽는다면 늦은 오후 하이킹을 시작해 정상에서의 일몰 감상을 추천하는 바이다.
엘라에서 만난 독일인 여행자 조지의 권유로 그녀와 함께 남부로 향하기 전 우다왈라웨(Udawalawe) 국립공원에 들러 1박짜리 코끼리 사파리를 즐겼다. 스리랑카 전역에서 사파리 투어가 행해지는 국립공원이 여럿 있는데, 그중 1972년에 설립된 우다왈라웨 국립공원은 스리랑카 코끼리의 서식지로 유명한 장소다. 약 250마리의 코끼리 무리가 거주하며, 국립공원 옆에 붙어 있는 우다왈라웨 엘리펀트 트랜싯 홈(Udawalawe Elephant Transit Home)에선 공원 내 버려진 새끼 코끼리가 사육사로부터 돌봄을 받는다.
↑ (좌)엘라 주변 하이킹 코스 중 가장 인기가 높은 리틀 아담스 피크, 공원 내 버려진 새끼 코끼리를 돌보는 우다왈라웨 엘리펀트 트랜싯 홈 |
사파리 투어 비용에는 일반적으로 이동수단인 4륜 구동 지프차량과 운전자, 가이드, 국립공원 입장료, 1박의 호텔숙박 및 식사가 포함된다. 업계에서 베테랑 소리를 듣는다며 자신을 소개한 운전자 덕분인지 지프를 타고 광활한 공원 안에 들어선지 불과 몇 분만에 덤불 속에 숨어 있는 코끼리 무리를 쉬이 만날 수 있었던 건 참 반가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인간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코끼리 무리를 여럿 지나치고 나자 반가움은 오직 인간 혼자만의 것임을 확신해마지 않았다. 매연과 소음을 뿌려대며 그들 거주지에 불쑥 찾아 든 인간이 그들에게 불청객으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은 또 인간 혼자만의 것으로 남았다.
어차피 여행 자체가 휴식과 휴가를 동반하는 말이지만 스리랑카 여행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경험하고 만끽한 건 남부에 도착하고 난 뒤였다. 우다왈라웨에서 버스를 타고 친절한 버스 안내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동한 남부 해안가에서 인터넷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멋들어진, 그리고 찬란한 바다를 만났다. 다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파도가 치고 야자수로 둘러싸인 길고 황량한 황금빛 모래사장을 품은 해변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제각기 특유의 색과 빛을 내뿜으며 섬나라 스리랑카를 과감히 드러내고 있는 해변. 남부 해안가에는 완벽하리만치 유려한 해변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여정을 시작해야 할지, 그중 어디에서 머무를지 선택에 어려움을 절감했다던 한 여행자의 후기가 이제 내 몫으로 다가왔다.
탄갈레(Tangalle)에서 갈레(Galle)까지 약 100㎞에 이르는 남부 해안가 하이라이트 구간을 여행하며 매 순간 행복한 고민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여정 가운데 베스트 해변을 꼽을 수 있을 만큼 고민의 답을 찾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선 순위를 매기고 추천대상을 찾는 것이 무의미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찾은 방법을 소개하자면, 남부 해변 하이라이트 구간 중간 지점인 월리웰라(Walliwela)에 짐을 푼 뒤 친절한 로컬 버스를 이용해 주변 해변 곳곳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버스가 남부 해안가를 끼고 달리기 때문에 서쪽이냐 동쪽이냐 방향만 정하고 나면 가까운 거리라도 달리는 버스를 쉽게 잡아타고 이동이 가능하다. 게다가 월리웰라는 서핑의 시작점으로도 탁월한 선택지 중 하나다.
↑ (첫 번째 사진)갈레 해변, (두 번째, 네 번째 사진)남부 해안가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웠던 코코넛 해변, 미리사 해변에 자리한 코코넛 트리 언덕 |
스리랑카 남부 해변은 세계적인 서핑 포인트가 많아 전 세계, 특히 유럽 서퍼족들의 방문이 잦은 지역이다. 월리웰라에는 서핑을 배울 수 있는 개인 및 그룹 레슨, 원데이클라스, 서핑 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업체가 해변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저렴하게 이용 가능한 서핑 장비나 프로그램 비용 등을 이유로 서핑을 목적으로 스리랑카에 입국해 장기 체류하는 여행객도 많은 편이다. 동양인보단 서양인의 비율이 압도적인데, 사실 서부나 중부와는 달리 남부 해변 곳곳을 장악한 서양인들을 보면서 시대상이 근세와 근대로 회귀한 것 같은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남부 해변 어디서든 매일매일 하루를 마무리하며 일몰은 무조건 사수했다. 여행 일정의 상당부분을 남부 해변에서 소비하면서 매일 같이 바라본 일몰 풍경은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를 남겼다. 일상에선 그다지 중요하다 생각지 않는 일몰, 여행에선 반드시 사수할 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이자 추억이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4호(23.4.1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