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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꿈을 품던 화곡동 빌라촌, 전세 사기의 놀이터가 됐다 [데이터로 본 대한민국]

기사입력 2023-01-14 09:00

20대 직장인 A 씨에게 서울 강서구 화곡동은 꿈을 꾸던 곳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며 처음 정착했던 곳이 화곡동이었고요. 길고 힘들었던 취업 준비를 했던 곳도 바로 이곳 화곡동 빌라촌이었습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전경(MBN 뉴스7 캡처)
↑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전경(MBN 뉴스7 캡처)
취업한 직후 옮겼던 한 신축 빌라가 화근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주변 이웃들이 “집주인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보증금을 어떻게 받냐고” 울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A 씨 역시 불안한 마음에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역시나 휴대전화는 꺼져있었습니다. 이제 계약이 끝나고 이사를 가야 하는데, 2억 원의 전세보증금은 어쩌나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A 씨는 전세보증보험을 들어놨던 터라,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화곡동에서 전세 사기는 A 씨만의 일이 아니었죠. 이미 ‘빌라왕’ ‘빌라의 신’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일당의 먹잇감이 된 화곡동 빌라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데이터로 본 대한민국>에서 분석해봤습니다.

화곡동 신축 빌라 전세 거래 82%가 ‘깡통’...전세가율 175%짜리 빌라도

취재팀은 국토교통부의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통해 지난해 서울시내에 발생한 빌라 전세 거래 데이터 12만 4,708건을 확보했습니다. 이 가운데서 신축빌라(2020년 이후 입주)에 해당하는 데이터 5,051건을 다시 뽑아냈는데요. 왜 하필 신축 빌라냐고요?

일명 ‘빌라왕’ 일당이 노린 것이 바로 신축 빌라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옆길로 새서 이들의 수법을 말씀드리면요. 이들은 실거래가 파악 어려운 신축빌라를 매입한 뒤, 실거래가에 근접하거나 오히려 실거래가 보다 높은 전세금을 받고 세를 놓습니다. 이후 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고 잠적하는 등의 수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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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세금이 실거래가의 90% 이상인 주택을 ‘깡통 전세’라고 하는데요. 당연히 전세 사기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죠. 그렇다면 지난해 발생한 화곡동 신축 빌라 전세 거래 중 깡통 전세 비율은 얼마나 됐을까요?

무려 82%였습니다! 지난해 화곡동에서 거래된 신축 빌라 전세 604건 중 495건이 깡통 전세였는데요. 이 495건을 다시 일일이 살펴봤습니다.


전세가가 매매가를 넘어서는, 그러니까 전세가율이 100% 이상인 역전세의 경우도 377건이나 됐습니다. 한 빌라는 전세가율이 무려 175%를 넘기기도 했는데요. 전세가가 실거래가의 2배에 근접한 거죠. 지난해 거래된 화곡동 신축 빌라 전세가율 전체 평균은 무려 101.2%였습니다.

빌라 전세 사기, 서울 서남부권이 위험하다

사실 이번 전세 사기 사태에서 화곡동이 두드러진 건 화곡동에 빌라가 워낙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해 화곡동에서 거래된 빌라 전세는 6,759건으로 압도적인 1위였습니다. 2위인 송파구 석촌동의 2.5배에 달하죠. 신축 빌라 전세 거래 역시 전체 1위였습니다.


그렇다면 화곡동 외에 서울의 다른 빌라촌은 어땠을까요? 지난해 신축 빌라 거래가 100건 이상 이뤄진 지역을 중심으로 깡통 전세 현황을 분석했습니다.


비율만 놓고보면 화곡동보다 더욱 위험 곳들도 많았습니다. 고시촌으로 유명한 관악구 신림동의 신축 빌라 깡통 전세 거래 비율은 75%, 금천구 독산동은 87%, 양천구 신월동은 무려 97%라는 수치를 보여줬습니다. 이 정도면 사실상 모든 신축 빌라 전세가 깡통 전세였다는 뜻이죠.


깡통 전세도 지역적 경향이 있긴 한데요. 서울 동북부보다는 서남부권의 비율이 높았다는 겁니다. 자치구 별로 살펴보면 양천구가 86%로 가장 높았고요. (거래량이 너무 적은 종로구를 제외하고) 강서구, 금천구, 관악구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동대문구(32%), 성북구(31%), 중랑구(31%), 마포구(19%), 용산구(5%) 등은 깡통 전세 비율이 비교적 낮았습니다.

전세사기, 젊고 가난할수록 더욱 가혹했다

전세 사기에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것 아시나요? 취재팀이 분석 대상이 된 신축 빌라를 매매가 기준으로 저가(하위25%), 고가(상위 25%), 중가(나머지)로 구분했고, 각각의 깡통 전세비율을 계산해봤습니다.


저가 신축 빌라의 깡통 전세 비율은 무려 80%로, 고가 빌라의 4.7배, 중가 빌라의 1.7배였습니다. 전세 사기의 피해자들이 고소득층 보다는 저소득층에 몰려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죠. 특히 부동산 거래 경험이 적은 청년들이 사기 일당의 주된 피해자들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A 씨는 여전히 화곡동 빌라촌에서 전세를 살고 있습니다. 왜 아직 화곡동에, 그것도 전세로 머물러 있냐는 질문에 A 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요즘 대출이자도 비싸고, 월세도 비싸잖아요. 그걸 낼 여력은 없고...워낙 화곡동 전세가 싸니까 어쩔 수 없이 있는 거죠. 이제부턴 사기를 안 당하게 잘 알아봐야죠.”

경제난을 온 몸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청년들은 끝내 자신이 잘 알아봐야 했다며, 다시 화곡동 빌라촌에 전세를 얻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세 사기’ 대란이 단순한 검거와 처벌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범정부적 대책 마련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화곡(禾谷)동을 순 우리말로 풀면 '볏골'입니다. 벼농사

를 짓기 좋은 기름진 땅이란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죠. 사실 빌라로 가득한 주거지가 조성되기 전 화곡동은 온통 기름진 논이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풍년을 꿈꾸는 농부들이, 지금은 성공을 꿈꾸는 청년들이 살아가는 동네 화곡동. 하루빨리 '전세 사기의 놀이터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길 바랍니다.

[민경영 데이터 전문기자 / business@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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