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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탁 (2022) 알루미늄, 인조 밀짚, 기계 장치, 동작 인식 카메라, 전자 장치, 110 x 450 x 450 cm |
머리없는 지푸라기 인간 18명이 거대한 원형 테이블 판을 어깨에 이고 힘겹게 움직인다. 테이블 위의 공과 같은 지푸라기 머리를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너무 실감난다.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분노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에 처해진 시시포스의 단체 버전이 아닐까 싶다. 머리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무기력한 인간 같다. 이런 모습을 감시라도 하듯 천장에는 검은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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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작은 방주, 2022, 폐종이박스, 금속 재료, 기계 장치, 전자 장치 (CPU 보드, 모터), 210 x 230 x 1272 cm. 02 (1) |
움직이는 조각(키네틱아트) 국내 대표 작가인 최우람(52)의 신작 '원탁'과 '검은 새'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약 30년간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유기체같은 움직임과 서사를 구현하는 '기계 생명체'를 만들어온 작가는 이번엔 택배 박스와 지푸라기처럼 재활용 재료로 좀더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오랜만에 개인전 '작은 방주'를 선보였다. MMCA현대차 시리즈 작가로 선정돼 신작 49점을 포함해 총 53점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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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우람, 빨강 (2021) 금속 재료, 타이벡에 아크릴릭, 모터, 전자 장치 (커스텀 CPU 보드, LED), 223 x 220 x 110 cm. |
본격적인 장면은 어두운 5전시실에 마련된 거대한 배를 통해 드러난다. 세로 12m의 대형 설치작은 방주 가운데 세워져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는 등대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두 선장, 벽에 꽂힌 닻, 축 늘어진 황금빛 천사 등이 불안한 정서를 강화한다. 구약성경 노아의 방주처럼 지구멸망 위기 속에서 희망을 품은 구조선이라기엔 주변 오브제가 조성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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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새, 2022, 폐종이박스, 금속 재료, 기계 장치, 전자 장치, 가변설치 |
방주는 닫힌 상태에서 커다란 궤처럼 접혀있다가 좌우 35쌍의 노를 서서히 들어올리면서 마치 장엄한 군무라도 하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주의 몸체는 철제이지만, 겉은 흰색이고 안은 검은 두꺼운 폐종이가 움직일 때마다 흑백의 대비가 단조로운 움직임에 율동을 더한다.
방주 앞에는 거울과 발광다이오드(LED) 전등으로 끊임없이 확장되는 이미지의 '무한공간' 한쌍이 세워져 있고 뒤에는 '출구'영상에서 계속해서 문이 열리는 이미지를 쏘아댄다. 무한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이 방향을 잃고 불안한 비관적 상황에 출구가 열린 결말로 희망의 가능성을 찾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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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방주 앞 최우람 작가<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
일종의 부조리극 같은 방주를 만나려면 바스락거리면서 서서히 피고 지는 꽃 '하나'(2020)와 '빨강'(2021)부터 보게 된다. 두 작품은 코로나19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착용한 방호벽과 같은 타이벡 소재를 사용했는데 전자가 조문용 헌화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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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우람_작은 방주, 등대, 두 선장, 제임스 웹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
전시장을 나와 복도에서 나란히 발견하는 원형조각-하얀 빛의 'URC-1'(2014)와 붉은 빛의 'URC-2'(2016)가 댓구를 이룬다. 이 작품들은 모두 자동차연구소에서 실험용으로 사용하다가 폐기된 자동차에서 분해한 전조등(전자)과 후미등(후자)을 모아 동그랗게 만들었다. 마치 장기기증으로 꺼져가는 자동차의 부품이 새 생명을 완성한 모습이 미래에 대한 긍정적 희망을 품게 해준다.
최우람 작가는 "로봇이 우리를 구할 것이란 믿음을 그리던 일곱 살짜리가 미술대학에 들어가 청계천 상인들의 도움 덕분에 독자적으로 기계생명체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며 "그동안 현실적인 문제로 펼칠 수 없었던 작업을 이번에 폭넓게 시도할 기회를 가져 뜻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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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우람, 앞쪽 붉은 URC-2(2016)와 뒷쪽 URC-1(2014)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
그는 특히 현대차 계열 현대로보틱스와 에이로봇, 오성테크, PNJ, 이이언, 클릭트, 하이브, 한양대 로봇공학과 등과 다양한 기술협력을 통해 대규모 기계 작품을 좀더 빨리 설치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원탁'에서 지푸라기로 만든 공처럼 생긴 머리의 형체를 학습시키고 천장의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테이블에서 머리의 위치를 파악해 신호를 보낸다.
김경란 큐레이터는 "수많은 모순과 불합리 속에서 존재에 대해, 가치 기준에 대해, 올바른 방향성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이 전시는 한편의 부조리
극을 연상시킨다"며 "작가가 생각한 방주란 우주를 표류하고 있는 지구이고, 우리는 이미 그 지구라는 방주에 타 있는 공동운명체와 같다"고 밝혔다.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대기할 각오도 해야 한다. 작가의 드로잉으로 머릿속을 탐험하는 재미도 있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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