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함에 전율했다. 그녀의 눈에 아우슈비츠 기획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근면성실한 보통사람이었다.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일상속에서, 무심하게 행해지는 악의 모티프에 관한 얘기다. 진짜 공포는 평범함에서 온다.
나는 사람을 관찰할때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맡았을때 그가 보일 행태를 상상하는 악취미가 있다(변태적이라 해도 할 말없다). 아렌트의 영향이다. 이 놀이가 재미있는 것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상상속 배역에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지적이면 지적인대로, 무식하면 무식한대로, 사가지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용감하면 용감한대로, 비겁하면 비겁한대로 다 제각각의 아우슈비츠 소장역을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몰입이 되는 캐릭터는 역시 말간 지식인 얼굴을 한 아이히만류의 소장이다. 그는 점잖고 타인을 배려할줄 알고 난폭함을 싫어한다. 독서량도 제법 되고 취향은 점잖다. 이 멀쩡한 문화인은 그러나 관료제적 능률성에 입각해 '유대인 청소' 직분을 수행한다. 그 일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조직이고 명령이며 '일' 그 자체다.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 상처입은 길 고양이에도 가슴아파하는 그의 도덕적 감수성은 조직의 노동윤리 앞에선 증발되고 만다.
나는 비슷한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히만이 특이했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현실이 특이했을 뿐이다. 그 현실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상황에서건 내부에서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성찰을 요구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바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그렇게 많지 않다.'권언유착' 의혹을 제기한 권경애 변호사도 그런 '희귀종'이다. 그가 페이스북에 적은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자. 그는 윤석열 검찰총장과 한동훈 검사장을 쫓아낼 것이란 어느 권력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촛불 정권이 맞느냐. 그럼 채동욱 쫓아내고 윤석열 내친 박근혜와 뭐가 다르냐.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어떻게 쫓아내느냐." 이런 생각이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한명의 권력자를 상대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대중, 특히 자기가 속한 진영을 상대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스로 생각할줄 알고 양심의 부대낌을 견디지 못하는 권경애 변호사는 히틀러가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맡기기에는 부적합한 인간유형이다.
우리는 권 변호사 같은 사람들에게 부채의식을 느껴야 한다. 일과 집단, 진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도덕적 감수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내부자를 포기하고 외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외부자가 없다면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내부자들은 스스로 얼마나 도덕과 원칙에 무감각해져 있는지 깨달을 기회조차 없게 된다. 니체는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타락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타락한 줄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타락에 물든 사람들이 실제 많아졌다. 그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문제에도 '최종적인, 확고부동한, 눈에 보이는' 물증을 요구하면서 짐짓 못본척 한다. 실제는 문제와 대면하기가 두려울 뿐이다. 도덕은 타락하고 있다.
타락보다 나쁜 것은 어리석음이다. 쿤데라는 에세이 '커튼'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성은 그럴듯한 거짓말뒤에 숨어 있는 악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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