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은 지도부 차원에서 누차 겸손함을 강조하며 한껏 자세를 낮췄다.
단독 과반의석 180석을 획득하며 사실상 '개헌'을 빼면 무엇이든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지만, 자칫 '오만'으로 비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10여년 전 '열린우리당의 비극'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해찬 대표는 이번 총선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열린우리당 사례'를 꺼냈다. 이 대표는 "열린우리당의 그 아픔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한다" "그때 우리가 잘못해서 150석이 80석이 됐다"는 말을 당원들에게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몰락은 진보·민주당계 정당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100년 정당'을 꿈꾸며 출범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대승의 후폭풍 속에 불과 3년 9개월 만에 간판을 내린 자멸의 기억이다. 진보 진영은 역대 최대 승리 직후 급격히 추락하면서 보수 진영에 연달아 두 번 정권을 내주는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모호한 당의 정체성과 여기서 불거진 내부 분란, 지도부의 부족한 리더십과 섣불리 밀어붙인 개혁 입법의 실패 등이 원인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은 단독 과반의석 152석을 거머쥐었다. 총선 전 새천년민주당·한나라당·자유민주연합이 밀어붙인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은 거센 국민 저항에 직면했다. 탄핵의 역풍 속에 열린우리당은 영남을 뺀 전국 대부분 지역에 깃발을 꽂았다. 민주화 이후 첫 여대야소 국면이 그렇게 펼쳐졌다.
↑ 2004년 17대 총선 때 압승한 열린우리당 관계자가 당사에서 당선 축하 무궁화 꽃을 달아주는 모습. [매경DB] |
여기에 17대 국회 개원 직후부터 민주노동당(10석)과 함께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 사립학교법 개정안, 언론개혁법안, 과거사 진상규명법안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이 최악의 자충수로 귀결됐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민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개혁을 밀어붙인 것이 독이 됐다. 특히 국보법의 완전 폐지 문제가 아킬레스 건이었다. 한나라당은 국보법을 빌미로 안보 이슈를 집중 부각하는 한편, 다른 법안들까지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내부에서 의견조차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이념적 노선부터 시작해 쟁점 법안, 당내 현안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다른 주장이 터져 나왔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108번뇌'라는 멸칭이다. 152명의 당선자 가운데 초선의원들이 108명(지역구 85명, 비례 23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기존의 정치문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소신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국회 선진화법도 없던 시절 과반 의석을 갖고도 121석 짜리 한나라당에게 오히려 끌려다니는 형국이 됐다. 무게 중심을 잡아야 할 지도부마저 당이 존재하는 내내 손바뀜만 반복했다. 약 5개월 안팎마다 당의 의장이 바뀌는 가운데 누구도 확고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2년 가량 소모전만 벌이다 4대 개혁은 흐지부지됐고, 민생 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른바 '무능한 진보'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도 이때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동력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16명 중 1명, 기초단체장 230명 가운데 19명, 서울시의원 106명 중 2명을 당선시키는 완패를 맛본다. 이어진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결국 공중 분해 수순을 밟았다.
민주당은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지난달 27일 개최한 21대 총선 당선인 워크숍 교육 자료에도 당시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은 이른바 '5계명'을 내세웠다. ▲승리에 취해 과반 의석을 과신하며 겸손하지 못함 ▲정부
[백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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