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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판사가 법복을 벗고 정치권에 입성하는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여러 명의 판사들이 무더기로 여당과 청와대로 직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사법부의 '권력예속화' 논란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양승태 사법부에 '판사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폭로한 이탄희 전 판사가 4·15 총선 출마를 위해 19일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이 전 판사는 민주당의 총선 인재 10호로 영입됐다.
이 전 판사는 지난 2017년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재직할 당시 대법원이 법관들을 뒷조사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퇴한 인물이다.
이 전 판사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1년간 재야에서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한계를 느꼈다"며 "특히 사법농단 1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는 상황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지난 13일 사법농단 연루 혐의로 기소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을 보고 제도권 정치에 뛰어들어 사법개혁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전 판사는 그러면서 사법 신뢰 회복을 위해 "비위법관 탄핵과 개방적 사법개혁기구 설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총선에서 당선되면 과거 사법농단에 연루된 판사들을 탄핵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이에 대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판사가 정권의 애완견 노릇을 하다 국회의원 되는 것이 '평범한 정의'라고 한다"며 "공익제보를 의원 자리랑 엿 바꿔 먹는 분을 인재라고 영입했으니 지금 민주당 윤리의식이 어떤 상태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고 일갈했다.
앞서 진보성향 판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으로 사법농단 사태 때 법관대표회의 의장을 맡았던 최기상 판사도 사표를 제출했다. 여당의 영입 제안을 받고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양승태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판결 고의지연'의혹을 제기한 이수진 수원지법 부장판사도 총선 출마를 선언하며 사직했다. 최 판사와 이 판사 모두 사법 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제기한 사법개혁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만만찮다.
현 정부 출범 직후에는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였던 김형연 부장판사가 사표를 낸 지 이틀 만에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는 지난해 5월 법제처장이 됐고, 그 자리는 같은 모임에서 간사를 맡았던 김영식 부장판사가 이어받았다.
김영식 법무비서관은 청와대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압수수색을 거부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그동안 양승태 사법농단 관련 의혹을 앞장서 비판해 온 장본인들이다. 사법권력의 폐해를 질타한 인물들이 어느 순간 정치권력으로 옮겨타면서 정권 비호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진보 판사들의 무분별한 여권행은 사법부의 권력예속을 초래하고 사법부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역시 악화될 개연성이 크다.
법원이 정권 눈치를 보게 되면 재판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훼손될 수 밖에 없다. 일부 정치판사들 때문에 묵묵이 재판을 진행하는 일선 판사들까지 '정치 집단'이라는 뭇매를 맞게 되고, 재판 업무에도 차질이 빚어질 소지가 크다.
오죽하면 동료 판사인 정욱도 대전지법 홍성지원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려 "법관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정치성이라고는 '1'도 없는 바보가 돼야 한다"며 "법관이 악덕을 체현하며 다른 국가기관의 통치에 참여하는 삼권분업을 시도하는 것만으로 이미 월권이다"고 지적했겠나.
법조계 안팎에선 일부 '정치판사'들을 향해 "그동안 사법개혁을 외친 이유가 정권에 잘보여 총선 뱃지라도 한번 달아보려는 권력욕심 때문이었느냐"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들이 개혁과 정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조국 전 장관 일가 비리, 유재수 감찰무마의혹,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등 정권 핵심 의혹과 관련해 입을 다물고 있는데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SNS에선 "정의롭고 양심있는 판사라면 정권비리 의혹에 쓴소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정치권력을 위해 정의를 버린 판사들"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진보 판사들의 총선 출마가 더 우려스러운 것은 '자신들만 옳다'는 이들의 편향되고 왜곡된 가치관이 당선 후 실제 입법에 반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탄희 전 판사가 언급한 것처럼, '비위법관 축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법농단 의혹에 동의하지 않거나 무죄를 선고한 동료 판사들을 무더기로 솎아내고 사법부를 무력화시키는 '입법독주'를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이 "터키 헝가리 폴란드 아르헨티나 등에서 보듯, 선출된 독재자들이 정권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에 대한 두려움없이 권력을 휘두른다"고 경고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법부는 권력을 견제하고 국민의 소중한 인권을 보호하는, 법과 양심의 최후 보루이다.
사법부가 정권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고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의 보조자로 전락하는 순간 '사법부'(司法 府)는 '사법부'(死法府)가 된다.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성을 놓고 트럼프 대통령과 공개 충돌할 당시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도, 트럼프 판사도, 부시 판사도, 클린턴 판사도 없다"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국민들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정권을 기웃거리는 판사들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 인권과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해 두꺼운 사건기록과 밤새 씨름하며 법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판사들이다.
[박정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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