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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특사 이위종 증손녀의 증언 "그는 전세계를 상대로 처절히 싸웠다"

기사입력 2016-08-14 16:41


“증조할아버지께서 헤이그 특사로 가셨을 때 지금 제 아들보다 젊은 스무 살이셨습니다. 특사 3인 가운데 가장 어렸지만 거기서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외교전을 펼쳐 모든 (만국평화회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만들었죠.”
을사늑약 2년 뒤인 1907년 고종 황제의 명으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마지막 특사’ 이위종 선생(1887~?).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이위종 선생의 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브(46) 씨는 지난 12일 서울에서 매일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증조할아버지께서 분단된 한반도를 보셨다면 절절하게 애통해 하셨을 것”이라며 “남과 북의 가족이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현실은 너무도 비극적”이라고 말했다. 피스쿨로브 씨는 인터뷰 내내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진한 긍지와 자부심을 보이면서도 남북이 분단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녀의 몸에는 한국인과 러시아인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다. 그녀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위종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외교권을 빼앗긴 치욕 속에서도 이준·이상설 열사와 함께 황제의 명을 받들어 헤이그로 달려가 대한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대한제국의 혼을 잃지않은 마지막 외교관으로서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로 간 이위종 선생에게 궐석재판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했고 결국 이 선생은 러시아에서 독립을 위해 분투하다가 실종됐다. 이러한 독립운동가의 피와 정신을 물려받은 그녀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선조들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 성장했고 증조부에 대한 책도 썼다.
피스쿨로브 씨는 “할머니께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후대 손자를 위해 증조할아버지의 인생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셨다”며 “증조할아버지는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흥미로운 인생을 사셨다”고 말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피스쿨로브 씨는 “20세에 불과한 나이에 외교관으로서 활약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를 더 사랑하게 됐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며 “후손으로서 그리고 역사학자로도 너무나 흥미로운 작업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변에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시던 아파트 여러 곳을 찾았다”며 “넓고 좋은 집에서 점차 좁고 누추한 곳으로 이사를 가셨던 행적을 뒤쫓다보니 너무 슬펐다”고 말했다. 이위종 선생은 망국의 아픔 속에서 생계와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현실적인 장애물을 뛰어 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똑똑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셨던 분인데, 삶은 정말 슬픈 이야기입니다. 시작은 정말 행복하게 시작했어요. 아버지(이범진 선생)가 미국, 러시아 등에서 외교관을 했었고 이때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고요.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모든 게 바뀌었죠. 유년시절 풍족하게 사셨는데 점점 가난해지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시던 곳을 찾아 둘러봤다는 건 증손녀로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피스쿨로브 씨 선조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구한말 일제침략에 항거한 역사다. 이위종 선생의 아버지인 이범진 선생도 최초의 러시아 특명전권공사를 역임한 애국지사다. 이범진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는 국치를 당하자 러시아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피스쿨로브 씨는 지난해 특별귀화 형식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고조·증조 할아버지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되찾고자 했던 독립된 한국의 국민이 되기까지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피스쿨로브 씨는 “제가 한국인이 된 이 사실 자체가 증조할아버지의 꿈을 이룬 것”이라며 ‘애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말했다. 피스쿨로브 씨가 말한 애국은 거창한 것이 아닌, 응당 해야 할 삶의 도리였다. 그는 “애국심이라는 건 나라가 어려울 땐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만 지금 한국에선 좋은 부모와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이 곧 애국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작은 퍼즐을 맞추다보면 보다 더 큰 목표를 향해 나

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만일 이위종 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우선 제 가족이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증조할아버지의 삶이 매우 자랑스러웠고 고마웠다고 말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성훈 기자 / 박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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