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한진해운 고위 관계자가 급하게 산업은행을 찾아갔다.
산업은행 담당자는 이 관계자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해야 했다. 바로 다음 날인 22일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이 각각 이사회를 열고 한진해운에 대해서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을 신청하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전 협의가 없었던 내용이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쟁점이 될 용선료 구조, 향후 계획 등에 대한 논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한진 측이 자율협약을 신청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며 “25일까지 서류를 보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앞서 현대상선은 3~4개월간 충분한 협의 후에 어렵사리 조건부 자율협약에 들어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대주주 사재출연, 계열사 매각 등 2년여에 걸친 협의를 거쳐 채권단 양해 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자율협약 신청시 필수요건인 경영권 포기각서 제출여부, 대주주 사재출연 여부, 사채권자 조정방안 등에 대한 언급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정부와 채권단은 이러한 사항들을 지적한 뒤 우려를 표시했지만 막무가내였다. 22일 한진해운은 예정대로 이사회를 열고 이날 자율협약을 신청하겠다고 공시했다. 금융당국과 산업은행은 당황했다. 결국 산업은행은 22일 밤 자율협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해명자료를 내며 강경 대응했다. 채권단 내부에서는 “대주주의 책임지는 모습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실제로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의 사재출연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 표시를 하지 않고 있다.
한진해운은 차입금이 5조 6000억원이지만 은행대출은 7000억원에 불과하다. 회사채(1조 5000억원), 선박금융(3조 2000억원) 등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체 차입금이 4조8000억원인 현대상선은 은행대출이 약 1조원이다. 다시 말해 한진해운은 은행대출 비중이 낮아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주도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용선료 협상도 마찬가지다. 첨예한 조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협의가 생략된 채 오너와 채권단이 목소리를 달리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지난달 말 만나 협의를 가졌지만 정교한 밑그림을 그리는데는 실패했다. 한진해운도 논란이 불거지자 “산업은행과 협의를 성실히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 오너와 정부·채권단 간에 갈등을 빚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갈등상황을 관리할 주체가 모호한 가운데 오너-채권단간 기본적인 의사소통마져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이 점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심지어 정부 내에서조차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점도 문제다. 긴박했던 지난 한 주 동안 정부부처 간에 마찰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 내 구조조정 ‘컨트롤 타워’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지난 15일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현대상선”이라고 발언한 이후부터 기업 구조조정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와 실무에서 준비를 해왔던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등에서는 볼멘소리들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한 정부부처 관계자는 “구조조정은 채권단과 기업 차원에서 해야 하는데 기재부에서 덜컥 숟가락을 얹으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재부도 주춤하는 분위기다. 기재부에서 “구조조정의 속도를 내자는 차원이었다”며 “정부 부처 실무는 금융위원회가 총괄”이라는 해명이 나왔다. 유 부총리도 22일 기자간담회에서 “정부는 한 가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실제 추진하는 주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22일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신청 공시는 정부부처들이 이처럼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정치권마저 구조조정 이슈에 개입하면서 오히려 구조조정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해운업에 이어 고용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큰 조선업 구조조정도 불가피한 만큼 보다 정교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최근들어 국회의원들로부터 구조조정과 관련된 문의를 자주 받고 있다”며 “조선 산업은 울산, 거제 지역에서 수만명이 실직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정치권이
[조시영 기자 / 박용범 기자 / 정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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