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메르스 환자를 진료하느라 집에 못가고 야전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런 전쟁터같은 와중에 지자체에서 각종 자료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네요. 일부 지자체는 직원들이 아예 상주하면서 환자 진료에 차질을 주고 있습니다.”
메르스 퇴치에 눈코 뜰새 없는 의료진들이 또 다른 복병을 만났다. 보여주기식 행정에 익숙(?)한 지자체들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로 각 병원에서 격리된 의료진은 줄잡아 600여명에 달한다. 상당수 의료진들이 감염, 격리, 과로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자체들은 시어머니 역할을 자처하며 일원화돼 있는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 보고체계와 달리 별도로 각종 자료 요청을 하고 있다.
지자체들로부터 가장 많은 요구를 받고 있는 의료기관은 현재 가장 많은 메르스 확진자를 발생시킨 삼성서울병원이다. 서울시는 지난 4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관련 심야 긴급기자회견에 앞서 오후 3시부터 10여명을 삼성서울병원에 급파했다. 지금도 이 병원에는 서울시 직원 3~4명이 상주하고 5~6명이 수시로 드나들며 각종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주로 음압시설, 의심환자 발생시 관리시스템, 장비현황 및 노출자 등과 같은 자료로 의료진이 직접 작성해야하는 항목이 많다. 삼성서울병원 측은 “서울시민의 메르스 확산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다양한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볼멘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메르스 대책본부는 감염내과 교수, 의무기록 행정직원, 총무과 직원 등 20여명이 12시간씩 근무교대하면서 24시간 일하고 있다. 한 직원은 “병원사정을 잘 아는 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병원에 협조적이지만 의료를 잘 모르는 지자체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가뜩이나 메르스 환자를 진료했다는 이유로 격리된 의료진이 많은데, 서울시 확인 요구까지 들어주려면 무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병원에서는 메르스 환자를 살려야하는 의료진들마저 지자체 업무를 돕기위해 투입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대학종합병원들도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다. 매일 메르스 현황을 질병관리본부에 보고하고 있지만 서울시도 ‘감염관리실’에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들은 “병원은 의료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만큼 공식적인 문서 없이 원내 자료를 외부로 유출할 수 없다”며 “서울시에 자료 요청 공문을 보내 달라고 하면 ‘그냥 보내달라’며 사실상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병원들은 서울시 보고와 관련해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한다. 한 병원은 “그래도 협조해야 한다” “질병관리본부 통제를 받고 있는데, 추가 인력을 투입하면서 까지 협조할 여력이 없다”는 공방까지 벌였다. 대학병원 관계자는 “감염관리실은 환자 관리로 정신이 없는데, 행정업무까지 떠맡아 추가인력이 필요할 지경”이라며 “메르스를 조기 퇴치하려면 무엇보다 지자체가 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잘못된 병원명을 페이스북에 올려 피해를 주는 지자체도 있다. 일부 지자체는 메르스 환자 발생과 이동경로를 자세히 적어 지자체 홈페이지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병원명이 틀려 비난을 사고 있다. 동탄성심병원의 경우 그냥 한림대병원이라고 이름을 올려 메르스와 상관 없는 한림대의료원 산하 다른 병원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병원 측은 화성시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정정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정치권도 국회에 앉아 전쟁터 장수를 불러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여야는 메르스가 확산되는 시기였던 지난 4일 대한의사협회장과 병원협회장을 불러 ‘전문가 간담회’를 연데 이어 11일에는 의료진을 불러 날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한 대학병원장은 “폐쇄회로 증거와 전자처방 등 자료는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책임 문제를 따지는 일은 당장 급하지는 않다”며 “시급한 것은 의료진들이 환자를 살릴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격려를 아
[이병문 의료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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