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셰프들 ④
복싱왕을 꿈꾸던 시골 촌뜨기 소년은 30년 후 우리나라 최고의 초밥 명인이 됐다.
자타공인 일식(日食)대가로 불리는 안효주(58)씨는 1958년 전북 남원에서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 그는 '큰 물에서 놀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다.
복싱 선수가 되고 싶었던 그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을지로 명보극장 뒤 한국체육관.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주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체육관에 먼저 다니던 고향 선배 덕으로 근처 식당에서 일자리도 얻었다.
낮에는 그릇 300~400개를 닦고, 새벽과 밤에 복싱 훈련을 한지 2년쯤 지났을까. 드디어 프로복싱 데뷔전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얄은 운명의 장난인지 심한 독감으로 데뷔전을 치르지 못했다.
크게 낙심한 그는 복싱왕의 꿈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기왕에 입대할 바에야 제일 힘든 곳으로 가자". 그래서 선택한게 해병대였다.
그러나 군제대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시 식당일을 하게됐다. 사지멀쩡한 그에게 주변에선 복싱체육관 트레이너, 운전기사 등을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식당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했다.
식당 일은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은 편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던 꿈은 아니었기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여러 식당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1984년 서울 강남의 한 일식당에서 지금의 요리 스승을 만나 일식의 기초에 눈을 뜨게 된다. 기초를 닦은 후 스승의 추천으로 신라호텔에 입사하면서 그 동안의 방황의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꿈이 시작된다.
호텔 근무 중 일본으로 연수를 가게 된 그는 현지에서 또 한 명의 일본인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 만난 스승이 일식의 길을 열어줬다면 일본인 스승은 길을 잘 걷는 법을 알려줬다.
일본인 스승은 지금도 홋카이도에서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는 일식의 대가다. 안효주는 그에게서 세세한 요리 테크닉뿐만 아니라 주방 식구들을 이끄는 노하우 등 많은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를 '미스터 초밥왕'으로 만든 초밥 속 밥이 비어 있게 만드는 기술도 이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다.
훌륭한 스승들 덕분에 많은 혜택을 입은 그는 자신의 제자를 볼 때마다 3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자신이 칼을 들 힘이 남아있는 한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줄 생각이다.
지금 그는 성공한 CEO다. 서울 강북과 강남에 대형 초밥집 3곳을 운영하고 있다.
18년 동안 호텔에서 근무하던 그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투자 해줄테니 크게 한번 해볼 생각 없나."
평소 단골로 호텔을 자주 찾던 대기업 회장님의 제안이었다. 그는 고민을 해야했다. 자칫 잘못될 경우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을 송두리째 날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결단을 내렸다. "한번 크게 제대로 해보자고".
그렇게 용기를 낸 것은 맛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 때문이었다. 비록 대기업 회장님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만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 인정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결국 그의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안효주 씨가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1990년대 일본 요리만화였던 '미스터 초밥왕'에 그의 초밥이 소개되면서부터다. 이 책은 일본 현지에서 1300만부 이상 팔렸고 국내서도 25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만화가 테라사와 다이스케는 책의 완결판을 위해 한국으로 그를 찾아와 일본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초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뜻밖의 부탁에 그는 시간을 달라고 했고, 일주일 뒤 그는 '인삼초밥'을 내놓았다. 6년근 수삼을 자신이 개발한 양념장에 24시간 재워 만든 초밥은 미스터 초밥왕 만화에 실렸고 만화를 보고 찾아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인삼초밥'을 이야기했다.
‘미스터 초밥왕’ 안효주가 생각하는 최고의 초밥은 무엇일까.
그는 주 재료와 보조 재료의 조화가 이뤄진 초밥을 최고로 친다. 밥에 무작정 재료를 올렸다고 초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먼저 주 재료인 밥을 만들 때 같은 지역의 쌀과 물로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보조 재료는 소스 맛이 아닌 재료 본연의 맛 그대로를 살려야 한다. 단순하고 지키기 쉬운 원칙 같지만 기본이 초밥 맛을 가른다.
그것 말고 그의 초밥에는 두 가지 비법이 더 숨겨져 있다.
초밥을 만들기 위해 밥을 뭉쳤을 때 중간이 비어져 있는 것이 바로 첫 번째다. 밥이 빈틈없이 뭉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밥과 밥 사이로 하늘이 보일 정도로 밥을 뭉쳐 초밥을 만드니 맛본 이들이 하나같이 사르르 녹는다는 표현을 했다.
두 번째 비법은 일본에서 제조해 공수하는 그가 개발한 양념장이다. 밥을 만들 때 섞는 이 양념장 때문에 안효주 초밥은 그냥 먹어도 간이 맞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가 초밥과 함께 살아온 시간도 30년이 넘었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 초밥왕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될 만큼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되돌
테이블 반대편 손님은 매일 바뀌지만 그는 한결 같이 서서 그들에게 초밥을 건네준다. 그에게 초밥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세상과 통하는 또하나의 길이다
Next. 한국의셰프들 다섯번째 손님은 한국의 조리명장 박효남 셰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기획·글 = 이길남 / 사진 = 이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