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문화재청 |
조선 후기 최고의 해금연주자로 손꼽히는 유우춘은 본래 노비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현감을 역임한 유운경이었지만 어머니가 계집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종모법이라고 해서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었다.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해도 어머니가 천한 종이었기 때문에 유우춘 역시 노비의 신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이복형이 노비 신분에서 해방해준 탓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노비의 신분을 벗어난 그는 용호영이라는 군영의 세악수(細樂手), 즉 군악병이 되었다. 노비였던 시절부터 해금을 연주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버지가 양반이었던 탓에 다른 이들처럼 심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금을 연주하는 세악수가 된 그는 최고가 되기로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3년 내내 연습을 거듭한 끝에 다섯 손가락 전부 굳은살이 생겼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노력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그는 한양 최고의 해금연주자라는 명성을 누린다.
거문고 연주자 철씨를 비롯한 다른 악대와 함께 연주하는 그의 해금 솜씨는 잔치에서는 빠질 수 없는 유흥거리였다. 궁궐의 연회에 불려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발해고를 쓴 실학자 유득공이 그의 생애를 기록한 한문 단편소설 ‘유우춘전’을 남길 정도로 인기와 관심을 누렸다. 하지만, 이렇게 인기와 명성이 올라갈수록 그는 깊은 고뇌와 자괴감에 빠졌다. 사람들은 해금이 내는 신기한 소리, 이를테면 벌레 우는소리나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를 듣고 신기해하지만 정작 연주를 해도 그 깊은 음색이나 소리에 대해서 몰라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명성을 누렸다고는 해도 해금을 잘 연주하는 세악수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심경은 유우춘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내가 연주하는 해금이나 거지가 연주하는 해금이나 똑같이 말총으로 활을 매고 송진을 칠한 겁니다. 내가 해금을 3년 동안 다섯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연습해서 지금의 경지에 도달했답니다. 다섯 손가락에 온통 못이 박혔답니다. 하지만, 실력이 좋아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외면하고 돈벌이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몇 달 동안 연습한 거지가 내는 기묘한 소리에 열광하고 환호하지요. 지금 내 명성이 온 나라에 퍼져 있지만, 그것은 단지 헛된 명성일 뿐입니다. 그중에 진정으로 해금의 연주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높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만 잠깐 듣다가 졸아버리니 나 혼자 연주하고 듣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연습에 몰두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유우춘으로서는 허탈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런 세상을 외면하고 돈벌이에만 열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최고의 해금 연주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니 그의 재능과 열정이 오히려 불행을 불러온 셈이다. 차가운 현실 앞에서 냉소적이 된 그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만 해금을 연주했다. 하지만, 단 한 명, 호궁기라는 친구만이 그의 진가를 알아줬다. 그래서 유우춘은 늘 호궁기와 둘이 해금을 연주하면서 쓸쓸함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호궁기 앞에서의 연주는 아마 수많은 관객, 심지어 임금 앞에서 하는 것보다 더 설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유우춘은 다시는 해금을 연주하지 않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음악적 가치와 재능을 몰라주고 단지 해금을 잘 다루는 연주자로만 그를 대했던 세상을 향한 나름의 복수인 셈이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