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중학야구무대에 투수 ‘빅3’가 있었다. 이들은 이 해 각종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나눠 가지며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청주중 이상군, 대구중 이효봉, 전남중 김태업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3명의 경쟁은 4년 선배인 최동원 김시진 김용남 트로이카에 못지않았다. 동기생인 무등중 선동열은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 셋의 적수가 되지 못한 것은 물론 무명 투수에 불과했다. 선동열이 전국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광주일고 2학년 말부터였다.
이들을 둘러싼 고등학교의 스카우트 경쟁은 이례적으로 뜨거웠다. 이효봉은 경북고와 대구상고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을 뿌리치고 아버지 이성규씨(작고, 전 MBC 해설위원)의 모교인 대전고로 진로를 결정했다. 이효봉은 이 일로 대전고 진학 후 1년을 유급하게 된다. 당시엔 중학교 졸업생은 해당지역 외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셋 중 가장 빠른 공을 던진 김태업은 동일계인 전남고로 진학이 확정됐다.
마지막 남은 건 ‘빅3’ 가운데 으뜸인 이상군이었다. 중학교 야구엔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던 그때 웬만한 야구팬은 이상군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상군을 데려가면 향후 3년 동안 고교무대를 평정할 것이란 기사가 매스컴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이 때 야구부 창단을 선언한 학교가 있었다. 한국화약에서 설립한 신생교인 천안북일고였다. 단, 이상군을 스카우트해 온다는 전제조건이 따랐다. 한국화약은 이상군 영입에 총력을 쏟았다. 재단 사무국장이 이상군을 만나기 위해 청주를 73차례나 오갔을 정도였다. 2년 전 중학 랭킹 1위였던 청주중 투수 김정수(작고, 전 MBC 청룡)를 창단팀 신일고에 빼앗긴 청주고와 세광고는 이상군을 타 지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결국 이상군은 500만 원의 거금을 받고 북일고로 진학한다. 당시 대기업 부장 연봉과 맞먹는 큰 돈이었다.
이상군과 함께 창단한 북일고는 1년 만에 전국대회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더니 이상군이 3학년인 1980년 마침내 봉황대기 정상에 올랐다. 그 후 북일고는 30년 넘게 고교야구의 최고 명문고로 자리 잡고 있다.
이상군이 어릴 때부터 발군의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건 천부적인 제구력 때문이었다. 이상군은 176cm, 65kg의 체격을 고등학교때부터 프로때까지 유지했다. 다소 왜소할지 모르지만 스스로 가장 완벽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 만큼 자기관리에 철두철미했다.
그의 빈틈없는 성격은 ‘면도날 제구력’으로 나타났다. 이상군은 중학교 시절부터 ‘컨트롤의 마술사’로 통했다. 작은 체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이상군의 한양대 2년 후배인 류중일 삼성 감독은 “이상군 선배는 대학시절 포수가 원하는 곳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00% 던져 넣었다. 내가 본 투수 중 최고였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상군은 실력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은 투수다. 북일고 창단멤버인 이상군은 공교롭게도 같은 한국화약 계열인 빙그레 이글스 창단멤버로 입단했다. 1985년 한 해를 2군에서 보내는 바람에 동기들에 비해 1년 늦게 프로에 데뷔해 손해를 봤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창단팀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얇은 선수층으로 혹사를 불러 온다는 단점이 있다. 이상군이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모든 경기를 거의 혼자 책임졌던 이상군은 프로에 온 뒤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한희민과 선발 투수진을 양분했던 이상군은 혹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데뷔 첫 해인 1986년 243⅓이닝을 던진 데 이어 1987년엔 246⅔이닝을 소화했다. 1986년 19번, 1987년 24번의 완투는 그의 투수수명을 갉아 먹었다. 이 와중에 그의 ‘컴퓨터 제구력’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48⅓이닝 연속 무사사구, 3경기 연속 무사사구 완봉승(이상 1986시즌)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불멸의 기록’이다.
비시즌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 교육 때 이상군에게 던지게 하고 스트라이크존을 점검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낭중지추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생팀의 한계는 이상군의 발목을 잡았다. 막상 빙그레가 정상권으로 발돋움하던 1988년부터 이상군의 구위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지난 2년 동안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깨부상과 은퇴, 그리고 복귀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간신히 100승을 채운
그러고 보니 중학교 시절 ‘빅3’ 중에선 그나마 가장 오래 선수생활을 했다. 김태업은 어깨부상으로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었고, 이효봉 역시 팔꿈치 부상으로 짤막한 프로생활을 뒤로 하고 유니폼을 벗었으니 말이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