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자본의 미학이다.”
- 가수 이승환
“돈이 많다는 건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게 많아 진다는 뜻이다.”
- 영화 감독 로베르트 로드니게이즈
예술을 얘기할 때 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예술은 이념이나 자본 같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독립적일 때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가난한 예술가’라는 표현에 하나의 로망 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까지 어떤 예술가나 작품도 자본 혹은 권력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과거 예술은 자본과 권력 기대지 않고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단지 미적 쾌감을 위해 존재하며 아무런 경제적 효용가치가 없는 예술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차 로렌초 데 메디치, 루도비코 스포르차, 프랑수아 1세 등의 당대의 재력가와 권력자들의 이리저리 좇아다니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평생을 보냈다.
현대에 이르러 대중문화예술이 하나의 산업영역으로 자리 잡으며 비로소 예술가들은 독립적인 지위를 얻는 듯 보였다. 소위 스타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이에 따르는 부의 축적으로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돌진했다. 어딘가 종속되지 않고 상상력을 가로막았던 숱한 장애들이 하나씩 사라지자 그들의 상상력은 더욱 분방해 졌다. 예술은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은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의 재주가 돈을 버는데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천성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털어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종종 분방해질 대로 분방해진 상상력 탓에 새롭게 구상한 작품은 자신이 가진 자본력을 넘어서기 일쑤였다. 조지 루카스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창조해 낸 스페이스 오딧세이 ‘스타워즈’를 1977년 처음 세상에 내놨다. 이후 1980년 두 번째, 1983년 세 번째를 ‘스타워즈’를 만들었는데 이후 다음 에피소드를 만드는데 자그마치 16년이 걸렸다. 이는 당시 특수효과 기술이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매 편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제작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이유가 컸다.
2012년 3월 2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시작으로 12개국 24개 도시를 거쳐 2013년 1월 28일 다시 서울 공연으로 마무리 된 빅뱅의 ‘빅뱅 얼라이브 갤럭시 투어’(Bigbang Alive Galaxy Tour)는 지금까지 우리 대중 가요사에서 자본과 테크놀로지, 상상력이 가장 거대한 규모로 결합해 완성된 작품이다. 이 공연을 위해 아티스트와 댄서, 스타일리스트를 비롯해, 10명의 밴드와 코러스, 무대 디자인과 조명 등 하드웨어 팀 150명, 현장 스태프 240명 까지 총 445명의 스태프가 투입됐다. 뮤직 디렉터 길 스미스(Gil Smith), 조명디자이너 리로리 베넷(Leroy Bennett), 공연 연출가 로리앤 깁슨(Laurieann Gibson) 등 세계적인 공연 전문가들이 고용됐다. 월드투어 전체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연기획사 중 하나인 라이브네이션이 기획했다. 장비와 무대 전체를 콘테이너선에 싣고 돌아다니며 거의 모든 공연장에서 동일한 수준의 무대를 선보였다.
쏟아 부은 자본력, 기술력, 노력만큼 ‘얼라이브 갤럭시 투어’의 공연 퀄리티는 기존 아이돌 가수의 그것과 분명 선명한 차이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뛰어난 사운드 퀄리티와 다이나믹한 조명은 기본이었고, 멤버들의 움직임과 표정을 가까이 담아내는 좌우 대형 스크린의 화질 역시 눈에 띄게 선명했다. 전면에 최소 여섯 대, 무대 바로 아래, 두 대의 지미집, 무대 위 아래를 움직이는 다수의 이동식 카메라는 멤버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T자형 돌출 무대를 따라 좌우로 설치된 무빙워크, 무대 아래로 퇴장, 또는 무대에 등장하는데 사용된 승강기, 객석을 날아오르는 와이어 등 다양한 연출을 위한 무대 장치들이 총동원 됐다. 1회 공연을 위해 댄서들까지 포함, 의상만 총 144벌이 사용됐다.
전체적인 공연 연출의 노련함은 감탄할 만 했다. ‘투나잇’(Tonight)을 시작으로 ‘핸즈 업’(Hands up), ‘판타스틱 베이비’(Fantastic Baby), ’하우 지(How Gee), ‘스투피드 라이어’ 등 주로 빠른 비트의 곡들을 연달아 쏟아내며 속도감이 최고조에 달하면 지드래곤의 솔로 ‘크레용’(Crayon), 지디앤탑(GD&TOP)의 ‘하이하이’(High high), 승리의 ‘스트롱 베이비’(Strong Baby) 같은 솔로 및 유닛 무대들로 전환시키며 분위기를 다른 방향으로 트는 식의 짜임새와 구성력은 상당히 탁월했다.
50여회에 달하는 공연을 통해 구성과 연출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자신의 매력과 장점을 극대화 시켜 표현하며, 예상 가능 한 관객 반응까지도 미리 읽어내는 빅뱅 멤버들의 무대 매너는 공연의 전체 완성도에 화룡정점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빅뱅이라는 팀의, 멤버 하나하나의 예술적 재능을 연출과 결합된 하드웨어 위에서 표현하는 일이란 자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이번 빅뱅의 공연은 글로벌 기업의 후원을 받아 제작 됐고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공연 타이틀에 해당 대기업이 출시한 제품의 브랜드 이름을 함께 달았다. 국내외를 통틀어 흔하지 않은 형태다. 해당 기업의 금전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이만큼의 퀄리티가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섣부르지만 분명 빅뱅이 이번 투어의 대장정을 끌어 나가는 데는 적잖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해당 기업 입장에서도 빅뱅이라는 아티스트의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자신의 제품에 투영시키며 얻는 홍보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으니 상호 윈-윈(Win-Win)이라고 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후 멤버 승리가 해당 브랜드의 제품을 무대 위로 들고 나와 관객들을 촬영하고 동영상 사이트에 바로 올리는 걸 직접 시연하는 정도도 어느 정도는 용인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관객과 팬 입장에서는 이 같은 방식의 대기업 후원을 통해 동일한, 혹은 그 이상의 퀄리티로 빅뱅의 다음 공연을 볼 가능성만 높아질 수 있다면 말이다. 아티스트에게도 팬에게도 자본은 거부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서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날 선 비판, 혁명 정신의 메시지를 담아 노래하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이 글로벌 음반 유통사 소니뮤직을 통해 앨범을 내는 건 하등의 비난받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자신들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가장 영리한 선택일 뿐이다. 소니뮤직의 글로벌 유통망 덕에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날개돋힌 듯 팔렸다. 하지만 아티스트라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거나 이에 종속되지 않는 선에서 자본과 일정한 거리와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는 분명 있다. 언젠가 이들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과 동일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올 지 모르는 것 아닌가. 빅뱅은 아티스트고 아티스트는 자신들이 표현하고 싶은 걸 어떠한 제한도 없이 표현하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빅뱅이 ‘더티 캐쉬’(Dirty Cash)라는 노래로 데뷔 했던 건 다들 기억하고 있지 않나.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현우 기자 nobodyi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