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또다시 부끄러운 한 획을 그었습니다.
2008년 옛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과 관련해 박희태 국회의장이 검찰 조사를 받은 것입니다.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국회 의장에 대한 예우 때문에 검찰이 직접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을 찾아가 조사를 벌였지만, 대한민국 국회 수장의 굴욕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검찰이 현직 국회의장을 조사한 것은 지난 1997년 한보 사건 당시 대검 중수부 수사팀이 공관에서 김수한 국회의장을 방문 조사한 데 이어 두 번째입니다.
박 의장은 처음 돈 봉투 사건이 불거지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기 바빴습니다.
지난 1월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고서 한 얘기입니다.
▶ 인터뷰 : 박희태 / 국회의장
- "현재 얘기하라고 한다면 `모르는 얘기'라는 그런 말씀밖에 드릴 수 없다. 기억이 희미할 뿐 아니라 당시 저는 중요한 5개 선거를 몇 달 간격으로 치렀습니다."
그러나 잇따른 검찰 수사가 계속되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자 지난 13일 국회의장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말을 바꿨습니다.
돈 봉투를 돌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일부 시인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 인터뷰 : 박희태 / 국회의장
- "일종의 집안 잔치고 그런 분위기 때문에 약간 법의 범위를 벗어난 여러 가지 관행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돌린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고, 박 의장 말대로 약간 법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그냥 없었던 일이 될까요?
지난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장 사퇴가 처리됐다면 박 의장은 검찰 청사의 좁은 수사실에서 조사를 받을 뻔했습니다.
어제 수사에서도 검찰은 진술인 또는 피의자가 아니라 의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조사 강도는 셌습니다.
박 의장 조사에 동원된 서류만 손수레 2대 분량에 달했고, 조사는 16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검찰은 박 의장을 상대로 고승덕 의원에서 300만 원이 든 돈 봉투 전달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있는지, 또 안병용 은평갑 당협위원장의 2천만 원 돈 봉투 살포에 개입했는지를 추궁했습니다.
아울러 박 의장이 전당대회 이전 라미드그룹에서 받은 억대의 변호사 수임료를 어디에 썼는지, 전당대회 자금 출처는 어딘지를 캐물었습니다.
박 의장은 어제 수사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다만,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을 했다는 후문입니다.
박 의장의 진술과 달리 검찰은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특히 돈 봉투 살포에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박희태 국회의장도 돈 봉투 살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검찰은 이번 주 중 박 의장을 포함한 관련자들에 대해 사법처리 방침을 밝힐 것으로 보입니다.
박희태 의장에 대해서는 불구속 기소할 가능성이 큽니다.
돈 봉투 살포가 일종의 관행이었고, 적극적 매수행위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국회 의장이라는 신분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희태 의장은 우리 국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국회의 권위에 작지 않은 생체기를 남겼습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오늘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과거의 잘못과 단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 인터뷰 : 박근혜 /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 "새누리당은 새롭게 거듭나고 있고, 과거 잘못과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과감한 쇄신을 하고 있다"
물론 박 의장을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니지만, 과거와 단절은 반드시 이런 잘못된 돈 봉투 관행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누리당의 쇄신은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2004년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으로 찍혀 천막당사로 옮겼을 때도 과거와 단절과 쇄신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4년 뒤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는 돈 봉투가 오갔고, 그 일에 현직 국회의장
대선 과정에서 돈을 뿌리는 행위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돈 살포를 하는 관행까지는 뿌리뽑지 못한 셈입니다.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한 국회의장, 그리고 다시 쇄신을 외치는 집권 여당.
쇄신의 종착점이 어디였는지, 그리고 그 쇄신이 정말 국민의 마음을 얻었는지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