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수에 담긴 미생과 완생의 길
항저우 아시안게임 한국 선전 기대
다음 수가 어디에 놓일지 모르는 것, 설사 예측해도 그 다음 수의 변화가 너무 다양하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이런 정신으로 한국 바둑이 전 종목 석권하기를, 선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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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매경DB |
#1 지난 8월23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9회 응씨배에서 한국의 신진서 9단이 우승했다. 신진서는 중국의 셰커 9단과의 결승 3번기에서 2연승을 거두었다. 응씨배는 4년마다 열리는 국제바둑대회로 일명 ‘바둑 올림픽’이라고도 한다. 1989년 대만 재벌 잉창치가 주최한 대회로 이후 응씨배라 불린다. 응씨배 우승 상금은 40만 달러, 약 5억3,000만 원이다. 이로써 제1회 대회를 우승한 조훈현 9단 이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최철한에 이어 신진서는 응씨배에서 우승한 다섯 번째 한국 선수가 되었다.
#2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중국 항저우에서 10월8일까지 열린다. 한국은 총 39개 종목에 1,140여 명이 참가한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목표는 최대 금메달 50개를 획득해 종합 3위를 확보하는 것. 이 중 한국의 숨겨진 카드가 있다. 바로 바둑이다. 지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은 정식 종목이 되었다. 당시 바둑은 남성 단체, 여성 단체, 혼성 페어로 3종목이었는데 한국이 모든 금메달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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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언스플래시 |
항저우 대회도 3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남성 단체, 여성 단체, 남성 개인이다. 중국은 혼성 페어와 여성 개인 종목은 제외시켰다. 현재 세계 여류기사 랭킹 1위인 최정 9단의 압도적인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남성 단체에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신민준, 김명훈, 이지현 9단이 출전하고 여성 단체는 최정, 오유진, 김채영, 김은지 선수가 출전한다. 남성 개인전은 신진서, 박정환 9단이 출전해 전 종목 석권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시안게임 바둑 리그는 9월24일부터 10월3일까지 열린다.
인공지능도 인간의 수담을 앞서지는 못한다
수담(手談), 말 없이도 대화가 통한다는 뜻으로 바둑 두는 일을 일컫는다. 바둑에는 등급이 있다. 아마추어 18급부터 아마추어 9단, 그리고 프로 초단부터 입신의 경지라는 프로 9단까지이다. 이 등급의 차이는 사실 급이나 단 하나의 차이가 아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바둑을 중계하는 TV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치수 경기가 열린다. 치수를 변경하는 것은 한마디로 ‘접바둑’이다. 이는 프로는 백을 잡고, 아마추어 도전자는 흑을 잡는다. 그리고 흑은 반상에 3~5점 정도 먼저 포석을 하고 두는 것이다. 그 정도로 프로 기사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입신의 경지라는 프로 9단이 되면 대개 10수 앞까지 내다본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두면, 상대가 저렇게 둘 것이고,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두고….’ 이렇게 10수 앞을 아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AI가 나오고 나서 이제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변수는 있다. AI는 매수 가장 승률이 높은 지점에 착수를 한다. 이를 ‘블루스팟’이라고 하는데, 인간이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를 두고,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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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알파고 대결 [사진=매경DB 김호영 기자] |
우리는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5번기를 기억한다. 당시 이세돌 9단은 알파고에게 제4국에서 이른바 ‘신의 한 수’를 놓으며 딱 한 번 승리했다. 알파고는 총 74전 73승 1패를 기록했다. 유일한 패배가 바로 이세돌에게 진 것이다. 인간에 비해 완벽하게 수읽기를 하고 수십 수 앞을 내다보는 AI의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둑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과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또 승률에 집착하는 인공지능보다는 난전을 즐기는 바둑, 끝내기에 완벽한 바둑, 형세를 중시하는 바둑 등 인간이기에 둘 수 있는 바둑의 모양과 형태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우리는 이를 ‘기풍’이라고 한다. 이는 기사마다 다르고, 또 누구와 바둑을 두는가라는 점에서도 그 기풍은 변화하고 혹은 더 치열해진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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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알파고 제4국(매경DB=한주형 기자) |
가로세로 각각 19줄, 총 361수를 놓을 수 있는 것이 바둑이다. 해서 집을 만들어 흑과 백 중 집이 많은 쪽이 승리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착수 금수 된 곳이 아니라면 반상에서 그 어디를 두어도 되기 때문이다. 2016년 1월20일, 대용량 서버로 바둑의 경우의 수를 계산한 결과가 나왔다. 즉 착수 가능한 경우의 수, 배치의 수를 계산한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수는 읽을 수도 없다. 208,168,199,381,979…로 총 171 자릿수가 나왔다. 대략 10의 171제곱수라고 한다.
바둑, 중국에서 시작해 일본이 꽃 피우고 한국이 주도
드라마 <미생>,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이다. 제목 ‘미생’은 바둑 용어이다. 한마디로 ‘아직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둑에서는 최소 2집을 만들어야 한다. 이 두 집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초일류 기사의 대국에서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두 집을 만들지 못해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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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명지전문대 체육관에서 ‘매일경제 여자바둑 대잔치’가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대국을 펼치고 있다.. 2023.3.11. [사진 매경DB 이승환기자] |
이 바둑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먼저 바둑의 영어 표기는 ‘한국 Baduk’, ‘중국 Weiqi’, ‘일본 Go’다. 20세기 바둑의 꽃을 피운 일본을 따라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는 거의 일본식 표기인 ‘Go’를 사용한다. 구글의 알파고의 ‘고’가 바로 ‘Go’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독, 바돌’이라 했다. 바둑돌이 돌에서 나온 것이고 바둑판의 가로세로 줄이 마치 밭과 같다 하여 ‘밭돌’에서 변형된 것으로 본다.
바둑이 활짝 꽃을 피운 나라는 일본이다. 전국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바둑을 좋아했으며 기소를 설립해 바둑을 가르쳤다. 기소의 관리자를 명인이라 호칭하고 대접해 바둑을 두는 이들은 명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연마했다고 한다. 이후 ‘바둑 4대 가문’이 탄생했다. 바로 혼인보, 이노우에, 야스이, 하야시 가문이다. 하지만 19세기 막부가 붕괴하자 이 바둑 가문도 문을 닫았다. 이후 일본기원이 설립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혼인보 타이틀전을 만들었는데, 이를 현대 바둑선수권대회의 시작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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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언스플래시 |
일본 바둑의 꽃을 피운 이는 중국 출신 오청원이다. 오청원은 1928년생으로, 어릴 때부터 바둑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 중국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이에 일본 최고 세고에 겐사쿠 9단이 1대 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4단을 중국에 보내 오청원의 기력을 테스트했다. 하시모토는 오청원의 수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에 세고에가 오청원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오청원은 44승 4패라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고 지금도 전설로 내려오는 ‘10번기’(10번의 치수 고치기, 같은 기사와 10번의 바둑을 두는 일)에서 총 17년 동안 11번의 10번기를 전승했다. 오청원의 스승 세고에는 오청원을 “타고난 천재에 엄청난 노력가”라고 평하며 오청원 이후 약 30년간 제자를 받지 않았다. “오청원보다 뛰어난 기재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다.
세고에가 30년 만에 3번째 제자를 받았는데 그가 바로 조훈현 9단이다. 세고에는 일본 하시모토, 중국 오청원, 한국 조훈현 등 삼국에서 한 명씩의 제자를 양성했다. ‘바둑은 오청원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라고 할 정도로 창의적이었던 오청원. 그의 ‘포석, 전투, 끝내기’는 그 이후 바둑의 교범처럼 되었고 이는 이창호라는 또 한 명의 불세출의 천재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바둑계의 중심이 되었다.
한국이 낳은 천재 기사, 조훈현·이창호·이세돌·신진서
한국 바둑계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저변이 두텁지 않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가 탄생하는 독특함이 있다. 바로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신진서이다. 1953년생 조훈현은 한국기원 최초 9단이다. 별명은 ‘조국수’. 이창호 9단의 스승이며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157회 통산 최다 타이틀, 1,953승 통산 최다승이다. 그의 전성기는 1989년 제1회 응씨배 우승이다. 당시 응씨배는 한국의 기력을 얕보고 겨우 한 장의 티켓을 주었다. 그런데 조훈현이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을 꺾고 우승하면서 한국 바둑의 전성기를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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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6년 3월 15일 대국을 마친 이세돌 9단이 구글 딥마인드 데미스 하사비스 CEO에게 바둑판을 선물하고 있다(사진 매경DB) |
1975년생 이창호의 별명은 ‘돌부처’이다. 1990년대부터 2002년까지 세계 바둑계 1인자로 군림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 상대가 먼저 질려버렸다고 한다. 이창호는 14세때 최연소 국내기전 타이틀, 16.5세 때 최연소 세계기전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박보검이 분한 택이의 모델이 바로 이창호이다. 특히 2005년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전은 지금도 회자된다. 우리나라는 이창호만 생존, 중국 기사는 5명 생존한 상황. 이창호가 중국 기사 5명을 모두 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이창호는 이를 해냈다. 이후 중국 기사 칭하오 9단은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 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이창호는 형세 판단과 끝내기의 초고수. 이창호는 상대의 대마를 잡거나 많이 이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한 집, 반 집 승리도 많았다. 해서 이창호가 중반 끝내기에 돌입하면 상대방은 “내가 진 것인가”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창호 묘수풀이가 유튜브에 많이 등장하는데 인공지능도 이창호의 묘수를 금방 알아채지 못한다고 한다. 몇 수 진행이 되어야 그제서야 ‘이창호의 깊은 뜻’을 알아챈다고 하는 절정의 고수였다.
1983년생 이세돌의 별명은 ‘센돌’. 별명처럼 전투에 능하고 특히 난전을 즐기는 스타일이라 상대방이 이세돌이 짜놓은 판에 걸려들면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이세돌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2003년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당시 무적의 이창호를 꺾으면서 세계 최강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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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씨배 1국에서 승리한 신진서(사진=한국기원 제공) |
2000년생 신진서는 현재 세계 바둑 랭킹 1위이다. 그의 별명은 ‘신공지능’, 인공지능처럼 바둑을 둔다고 해 붙여진 별명이다. 수읽기, 형세판단, 전투력에서 초일류이다. 신진서는 2020년 제22회 농심신라면배에서 한국의 네 번째 주자였다. 중국의 탕웨이싱에 승리한 신진서는 이후 이야마 유타, 양딩신, 이치리키 료, 커제를 모두 물리쳤다. 이처럼 5연승으로 우승을 한 것은 이창호의 2005년 ‘상하이 대첩’ 이후 16년 만의 승리이다.
일본에서 활동한 조치훈 9단은 “목숨을 걸고 둔다”고 밝혔다. 또 임해봉 9단은 “만약에 바둑의 신과 목숨을 걸고 두라면 4점을 두겠다”고 했다. 이처럼 바둑은 그 한판에 모든 것을 쏟아놓은 진심진력이 필요한 경기이다. 바둑을 끝내고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는지 실제 기절하거나 심지어는 피를 토하는 죽는 일도 있었다.
바둑에도 십계명이 있다. 마치 인생의 교훈과 같은 계명이다. ‘부득탐승不得貪勝’은 욕심이 앞서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
라. 욕심이 앞서면 실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공피고아攻彼顧我’는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살피라는 말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이런 정신으로 한국 바둑이 전 종목 석권하기를, 선전을 기대해본다.
[글 권이현(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한국기원, 무신사 스탠다드, 매경DB, 언스플래시]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