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온실보고서>에서 창경궁 대온실 공사 책임자였던 일본인 후쿠다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며 사케를 와인으로 대체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꿈꿨습니다. 비록 일본산 와인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뜬금없이 미국 메이저리그 뉴스에서 사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을 보며 떠오른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LA 다저스에 입단한 사사키 로키가 등번호 11을 양보한 미겔 로하스에게 일본 전통 술과 잔을 선물했습니다.
동영상을 통해 보면 사사키가 선물한 사케는 일본 아사히주조가 만든 닷사이의 최상위 라벨인 소노사키에와 닷사이 23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닷사이는 아베 전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현에서 생산되는데 그런 탓인지 아베 정권에서 주요 행사에 만찬주로 사용되며 큰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이중 소노사키에는 면세 가격이 3.8만 엔에 달하는 최고급 제품입니다. 영문명은 Beyond로 대표 상품인 닷사이 23을 뛰어넘는 궁극의 사케를 지향하며 만든 제품입니다. 도쿄 긴자에 있는 닷사이 스토어는 전 라인업에 대한 시음도 가능해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사키가 술과 함께 선물한 잔은 일본의 전통 공예품인 에도 키리코 제품으로 보입니다. 에도 시대 후기인 1800년대부터 서양의 유리 제품을 본떠 만든 제품인데 일일이 수공으로 무늬를 새겨 생산량이 매우 적습니다. 술잔 하나에 30~40만 원을 호가하는 제품입니다.
일각에서는 오타니가 지난해 다저스에 입성하며 등번호를 양보한 조 켈리에게 페라리를 선물한 것과 비교해 사사키가 너무 소박한 것 아니냐는 우스개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일본 출신 선수가 자국의 가장 좋은 술과 술잔을 선물로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특히 닷사이는 최근 미국에 양조장을 오픈해 미국 쌀과 물로 만드는 ‘닷사이 블루’를 새로 선보였는데 이번 일화로 인한 홍보 효과도 짭짤할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저리그에 일본 프로야구선수들의 진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타니는 야구 실력 뿐 아니라 인성에 대한 칭찬도 자자합니다. 오타니를 비롯해 일본 출신 선수를 응원하는 전 세계 야구 팬들은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질 겁니다. 오타니와 사사키의 대선배격인 이치로는 최근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습니다. 켄 그리피 주니어는 이치로를 향해 "루키가 해야 하는 일은 사케를 가져와야 한다"며 "25년 만에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 신인이 됐으니 둘 다 좋은 사케 한 병을 기대한다"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정후와 김혜성 등 한국 선수들의 선전도 기원해봅니다.
[이성식 기자 mods@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