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조선왕궁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총 5곳이다. 이 외에 ‘궁宮’이 붙은 곳도 몇몇이 있다. 고종이 왕세자 혼례를 위해 지은 안국동별궁(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 자리에 있었다), 정조가 사도세자 사당을 높여 부른 서울대병원 앞 경모궁, 경복궁 뒤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이 그렇다. 그런데 ‘운현궁雲峴宮’은 그 성격과 규모에서 남다르다.
↑ (사진 장진혁)
1863년, 철종이 세상을 떠났다. 왕실 최고 어른 조대비는 파락호 신세인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에게 옥새를 넘겼다. 이가 바로 고종이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12세로 자연히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대원군의 저택 운현궁은 창덕궁과 가까운 운니동에 있었다. 이곳에서 고종이 태어나고 컸으니 운현궁은 ‘고종의 생가이며 잠저’로 성지가 되었다. 대원군은 1864년 사랑채 노안당과 안채 노락당을 지었고 1869년에는 별당 이로당, 영로당을 그리고 1912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양관을 지었다.
운현궁은 대원군의 권력과 비례로 커졌다. 당시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운현초등학교, 일본문화원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궁이었다. 더구나 모든 건물들은 최고급 목재를 사용, 양식 또한 궁궐 건축을 따랐다. 대원군은 창덕궁을 수시로 출입하기 위해 정문을 창덕궁 방면으로 짓고 임금과 궁을 수호하는 금위영을 통과하는 자신만의 통로를 만들었다. 당시 운현궁 안에는 항상 수백 명의 하인, 식객, 관리, 군인들이 상주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노안당老安堂’은 처마에 각목을 덧대어 차양을 설치할 수 있는 구조이다. 현판은 『논어』에 나오는 ‘노자안지老者安之’ 즉 ‘노인을 편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은 ‘노락당老樂堂’이다. 이곳에서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거행되었다. 또 복도를 통해 이로당과 연결된다. 아무리 임금의 생부라도 국법에 임금과 왕비가 사용하던 건물은 신하가 사용할 수 없었다. 해서 ‘이로당二老堂’을 새로 지었다. ‘이로二老’는 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흥선대원군의 아내, 고종의 친모) 두 사람을 의미한다.
지금 운현궁은 고즈넉한
공원 같다. 안에는 유물전시관도 있어 왕과 왕비의 가례복, 대원군이 내린 교의, 척화전과 각종 생활유품도 볼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이 머물던 궁이 아니지만 유일하게 ‘궁’의 권위와 규모를 갖고 있던 도심 속 역사의 흔적이다.
[글과 사진 장진혁(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0호(24.10.1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