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바오딩(保定)을 방문했을 때는 한겨울 추위가 떠난 자리에 아직 봄의 기운이 도착하지 못했던 3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북방 정원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구롄화츠(古蓮花池)에서는 생각만큼 따뜻함을 느끼진 못했다.
바오딩은 수도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140km 정도 떨어져 있는 허베이성(河北省)의 도시로, 인구가 무려 1천155만 명에 이르는 중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도시다. 도시 이름 자체가 수도를 지킨다는 뜻을 지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베이징을 지키는 관문 역할을 했던 도시이다.
↑ 중국 북방 정원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구롄화츠의 어느 봄날 풍경. / 사진 = MBN 촬영 |
청나라 때 수도 베이징을 둘러싼 지역의 행정구역을 직례성(直隸省)이라고 불렀다. 시기에 따라 계속 변하긴 했지만, 가장 넓을 때는 지금의 허베이성은 물론 허난성, 산둥성 일부에 랴오닝성과 내몽고 일부 지역까지 포함됐을 정도로 광활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직례성을 다스리는 총독의 근무처 즉, 직례총독서(直隸總督署)가 바오딩에 있었다.
베이징을 완전히 감싼 지역의 총독이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청나라 조정에서 가장 권력이 쎈 축에 속했고, 특히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황실의 권위가 추락한 청나라 말기엔 실세 중의 실세가 됐다.
대표적인 총독들의 이름을 한번 나열해 보자. 청궈판(曾國藩), 리홍장(李鴻章), 위안스카이(袁世凱).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들이다.
↑ 바오딩 직례총독서 정문. 베이징과 가깝다 보니 이곳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고 한다. / 사진 = MBN 촬영 |
안타깝게도 이들과 우리나라의 역사는 악연이다. 리홍장이 실권자였던 시기 청군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을 이유로 조선 땅에 들어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연행해갔다. 리홍장은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배후자로 지목하며 직접 심문한 뒤 이곳 바오딩에 3년간 유폐시켰다.
3년 후 대원군이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는 리홍장의 후계자로 떠오르던 위안스카이가 조선을 감시하는 자격(監國大臣)으로 건너와 조선 국정에 간섭했다.
조선 땅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던 청나라와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일본,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과의 세력다툼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에 외교무대엔 이렇게 거칠고 투박한 방식도 동원됐다.
↑ 바오딩 직례총독서 내부 전경.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중국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 중이었다. / 사진 = MBN 촬영 |
이번 주초엔 4년 반 만에 한일중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4년 반 전 8차 회의가 열렸을 때와 지금의 국제정세는 너무나 크게 변했다. 미국과 중국이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하고 있고, 북한의 핵 능력은 더욱 정교해졌으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물론 이란-팔레스타인 전쟁까지 세계 곳곳에서 소위 조용할 날이 없는 시기이다.
우리에게 특히 관심이 큰 건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다. 소위 ‘안보는 미국-경제는 중국’이라는 말들을 하는데, 이제 이런 구분조차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외교적으로 힘든 시기임이 분명하다.
미국만을 바라보고 있자니 바로 옆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점점 밀려날 게 걱정이 되고, 중국과 관계를 모색하자니 미국의 도움 없이 북한이라는 위협과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한다는 부담이 커지니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는 상투적인 말조차도 무게가 느껴지는 때이다.
어쨌든 경색됐던 한중 관계가 풀릴 계기는 조금씩 마련되고 있는 상황인 건 다행이다. 한중 양국의 외교장관이 만나서 각자 현재의 생각들을 최대한 털어놓은 건 대화의 출발선을 그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또 동북아 3국의 정상이 직접 만난 것 역시 언제든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신호탄이 될 수 있어서 그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가 이를 계기로 최대한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둬서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초강대국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점을 찾길 바랄 뿐이다.
↑ 총독의 집무실. 먼발치서 황제를 상징하는 해를 바라보는 학의 그림이 걸려 있다. / 사진 = MBN 촬영 |
외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은 다를 바가 없다. 각자 자기 나라의 최대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의 양보를 때론 대화와 타협으로, 때론 압박과 무력 사
그 와중에 초강대국 몇 나라가 다른 나라에 자기 편에 설 것을 압박하는 모습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방법이 소위 ‘줄 잘못 선’ 대가로 황제의 아버지가 납치되던 거칠고 투박한 모습만 사라졌을 뿐, 국제무대는 진영의 싸움이라는 사실은 변하기 힘들다는 게 역사는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윤석정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