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러 관계 타이산처럼 굳건”
블라디보스토크항 진출에 성공한 중국…그다음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첫 구절은 조선 시대 문인 양사언(梁士彦, 1517~1584)이 지은 시로, 제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데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구절은 속담으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난처한 지경에 빠진 상황을 비유한 말이다.
두 구절에 모두 타이산(泰山, 태산)이 들어간다. 타이산은 중국 산둥성에 위치한 산이다. 지난 연재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엔 오악(五嶽)이라고 부르는 명산이 있는데, 중악 총산(崇山, 두 번째 구절에 나오는 숭산이 이 산이다), 동악 타이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헝산(衡山), 북악 헝산(恒山)이 그곳이다. 이 오악 중에 으뜸이 바로 타이산이다. 물론 최근 ‘오악보다 더 큰’ 우당산을 갔었지만, 내친김에 내가 거주하고 있는 베이징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다는 타이산도 가봤다.
↑ 입구에서 바라본 태산의 모습. 위에 구름이 조금 있었지만, 산 아래는 날도 좋고 무척이나 더웠다. / 사진 = MBN |
베이징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타이산 자락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쨍쨍하고 날은 더워 입고 간 겉옷은 배낭에 넣어두고 물을 한 병 사서 마셨을 정도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날씨가 요변(妖變)을 떤다’고나 해야 할까. 올라갈수록 날은 점점 흐려지더니 급기야 정상에 올랐을 땐 세찬 비와 강풍이 불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타이산은 중턱부터 정상 입구까지 케이블카로 갈 수가 있는데, 정상에 올라 케이블카 타는 곳을 지날 때 보니 외줄에 의지한 케이블카가 강풍에 좌우로 심하게 흔들려 보는 내가 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저러다 정말 케이블카가 끊어져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산 아래의 풍경과 너무도 다른 정상의 모습에 불과 한두 시간 만에 내 처지가 이렇게 바뀔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산 아래는 분명 맑은 날씨에 타이산의 형체가 뚜렷이 보였건만, 정상까지 와서 돌아보니 비바람과 짙은 안개에 1~20m 앞도 전혀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 사진 = MBN |
중국은 최근 자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이 타이산에 비유하고 있다.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王毅)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지난 2월 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중-러 관계는 타이산 같이 굳건하다”고 강조했다. 또 중국 관영 신화통신사 역시 지난 3월 “양국(중-러) 관계는 성숙하고 강인하며 타이산처럼 안정돼 새로운 대국 관계의 패러다임을 수립했다"고 적었다.
굳건. 안정. 중국 사람들에게 이런 인상을 주는 것이 타이산이다. 왜일까? 타이산의 높이는 1,532m로 사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타이산보다 높은 산이 꽤 있다. 또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전부 계단으로 돼 있어서 지치기는 해도 건강한 사람이라면 아예 오르기를 포기할 수준까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타이산은 중국 그리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거대한 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먼저 정치적으로는 타이산은 역대 황제들이 하늘의 뜻을 받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했던 곳이어서 신성함이 부여됐다. 여기에 지리적으로는 타이산 자체가 넓고 완만하게 퍼져 있으며, 타이산 반경 몇백km 안에 큰 산이 없어서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타이산이 더 높고 신기해 보였던 이유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중국이 러시아와의 관계에 타이산을 계속 언급하는 건 현재 국제정세에서 그만큼 러시아가 중국에게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으면서 중국 편을 들어줄 나라가 러시아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이건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이상 이어지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의 각종 제재로 러시아 경제는 상당히 곤란한 지경이다. 이럴 때 중국이 손을 내밀어줬다. 미국의 제재 때문에 직접적인 도움은 어렵다 해도 민간을 중심으로 한 영역에서 이미 중국은 상당한 수준으로 러시아에 협력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쌍방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부모형제 사이에도 다툼은 있는 법. 하물며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치는 국제무대에서 서로 다른 두 나라가 언제까지 휘파람을 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영토 전쟁을 벌이던 앙숙 아니었던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지난달 발표된 중국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 획득이다. 중국 해관총서는 지난달 4일 홈페이지를 통해 ”지린(吉林)성 국내 무역 화물의 국경 간 운송업무 범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경유 항구’로 신규 추가한다”고 전했다. 중국의 도움이 절실한 러시아가 중국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사용을 허가한 것이다. 덕분에 중국 지린성은 랴오닝(遼寧)성까지 거의 1천km를 이동한 뒤에야 바다를 이용할 수 있던 것을 2~300km만 이동해서 해운 물류를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 중국 천하 명산 오악 중에서도 타이산이 으뜸이라고 해서 바위에 새겨진 글귀가 바로 오악독존(五嶽獨尊)이다. 중국 5위안 지폐 뒷면에 같은 그림이 있다. / 사진 = MBN |
앞서 얘기했듯이 중국과 러시아는 17세기 이후 국경을 맞대고 치열하게 영토 전쟁을 치렀다. 청나라 초기엔 중국의 국력이 앞섰지만, 19세기 들어서 청나라의 국력이 기울자 서구 열강에 의해 수모를 당한 바 있다. 러시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청나라는 1858년 아이훈조약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이북의 엄청난 영토를 러시아에 빼앗겼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마저 잃고 말았는데, 블라디보스토크도 그때 러시아 땅이 됐다.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을 얻었고, 중국은 동해로 가는 길이 막혔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지 않았나. 160여 년이 지난 지금 두 나라의 처지는 또다시 뒤바뀌었다. 중국은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툴 만큼 국력이 커졌다. 러시아는 호언장담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에 발목이 잡히며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나온 블라디보스토크항 사용권이라 더욱 주목된다.
중국이 지금 당장은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물류 이동을 위해서만 쓰겠지만, 지금보다 러시아의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중-러 관계 역시 중국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면 블라디보스토크항에 중국 군함이 정박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다시 동해, 나아가 태평양으로 향하는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나 일본, 그리고 미국에게는 또 다른 안보 위협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맑은 하늘 아래 호기롭게 시작했던 등산인데 불과 서너 시간 만에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떨었던 그 날을 기억해보면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수밖에.
↑ 비바람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타이산 정상의 풍경. “타이산처럼 굳건하다”는 중-러 관계의 앞날도 이러지 말란 법은 없다. / 사진 = MBN |
[윤석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