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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생인 김학수 씨는 초등학교 시절 집 근처(서울 상도동)에서 우루과이 라운드(1986년) 협상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켜보며 외교관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17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혼자 건너와 오하이오에 있는 사립학교 웨스턴리저브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미국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점수외에 자신만이 가진 장기가 없으면 대학입시에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학교 뮤지컬 오디션에 참석했다.
사실 그는 어릴적부터 클래식음악에 심취했던 어머니 밑에서 재미삼아 성악가 엄정행의 LP판을 따라 부르기도 했고, 중학교때 재능을 알아본 학교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한달에 두세번씩 레슨을 받으며 정식으로 성악에 입문하였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음악저널콩쿠르 중등부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또래보다 성숙한 소리를 가졌던 김학수 소믈리에는 당장 "펜잔스의 해적들"에서 프레데릭 역할을 맡으며 고교생활내내 교내뮤지컬의 주연을 독차지 하게 되고, 그렇게 공연예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학에 간 이후에도 비록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끈을 놓지 못했다. 미국 사립명문 노스웨스턴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다른 모범생들처럼 경제학을 전공으로 택한다. 하지만 졸업은 쉽지 않았다. 김학수 소믈리에는 "경제학에 필수적인 수학과 통계학에 관심을 잃으면서, 졸업이 힘든 상황에 도달했다"며 "그러자 담당 교수가 슈베르트와 모짜르트, 베토벤에 탐닉하며 고교 때 배운 독일어를 활용해 독일경제학을 연구해 보라는 조언을 해 줬다"고 했다.
이후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복귀한 후에도, 꾸준히 쌓아온 실력으로 노스웨스턴 음악대학에서 베르디 "팔스타프"의 주연 펜튼 역을 맡게 되고, 우연히 이 공연을 보고 온 한 독일 지도교수님의 "타고난 재능은 쓰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것"이라는 조언에, 외교관이라는 꿈과 대학교 전공 등에 상관없이 드디어 항상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오페라 가수가 되어보겠다는 꿈을 굳힌다. 2004년 대학 졸업 직후, 당장 미국 뉴욕으로 와서 오페라 극단 오디션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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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수 씨가 싸라소타 오페라에서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역을 할 때 모습이다. |
친구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갓 주목 받기 시작한 '정식당'에서 2012년부터 파인다이닝 서비스를 몸에 익히기 시작한 그는, 더욱 완벽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와인과 음료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하면서 소믈리에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며 탁월한 무대매너로 청중을 사로잡아야하는 오페라 가수라는 그의 특수한 배경은 소믈리에라는 직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정식당이 2년 연속으로 한식 최초로 미슐랭가이드로 부터 별 1개와 2개를 수상하면서 레스토랑 업계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만 40세가 되던 2018년 좀더 많은 것을 배워보기 위해 6년간의 보금자리를 떠나기로 한 그는, 뉴욕과 파리의 미슐랭 별 3개의 식당들을 아우르며 20년 넘게 헤드소믈리에로 활약하던 미쉘 쿠브로의 후계자로 퍼쎄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후 여러 경쟁자를 제치고 3년만에 헤드소믈리에로 승진하게 된다.
한 분야에 몸을 담아도 도달하기 힘든 인물들에게 각기 다른 분야에서 발탁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배결은 무엇일까?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꿈을 이루어진다는 믿음 아래, 항상 '예스'라고 대답하고 고개 숙이고 일만 했죠."
이제는 뉴욕에서 손꼽히는 소믈리에가 되었지만, 지금
[실리콘밸리 = 신현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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