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 때 북한 비핵화 문제 등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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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0월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해 김정일과 만나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
북한과의 외교 물꼬를 트고 비핵화 문제를 적극 지휘했던 미국 첫 여성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84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체코 프라하 이민자 출신인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11세 때 외교관이던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넘어와 국무부 수장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유대계인 부친은 나치와 공산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녀의 할머니를 포함해 26명의 가족이 홀로코스트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웰즐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조지타운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이 그의 제자입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1984년과 88년 민주당 대선후보의 외교 고문을 맡으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1기에 유엔 주재 대사를 맡았고, 2기인 97년 국무장관에 취임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 사례입니다. 당시 상원은 만장일치로 그의 인준안을 통과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확장을 옹호하고 발칸반도의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동맹의 개입을 촉구해온 인물입니다. 미국의 적극적 개입주의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핵무기 확산 억제를 추구하며 전 세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화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특히 북한 비핵화 문제에 깊숙하게 관여했습니다. 국무장관 재임 시절인 99년 미국이 이른바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한 '페리 프로세스'를 발표하고, 대북 경제 제재 완화 조치도 끌어냈습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2000년 7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백남순 당시 북한 외무상과 회동해 북미 고위급 간 교류에 물꼬를 텄습니다. 같은 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과 적대관계 종식, 평화보장 체제 수립, 미 국무장관 방북 등 내용을 담은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었습니다. 그해 10월 미국 장관으로 처음으로 평양 땅도 밟았습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은 당시 올브라이트 전 장관 밑에서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냈습니다. 셔먼 부장관도 당시 평양 방문에 동행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녀의 손은 역사의 흐름을 뒤집었다. 모든 역할에서 맹렬한 지성과 예리한 재치로 미국의 국가 안보를 증진하고, 전 세계 평화를 증진했다"고 애도했습니다. 조지 W 부시 전
뉴욕타임스(NYT)는 그를 추모하며 “국제 문제에 대한 뛰어난 분석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달 23일 NYT 기고문에서 "푸틴이 궁지에 몰렸다고 느낀다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우크라이나 침공은 역사적 실수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디지털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