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도광산 시설 대부분 메이지 시대 이후의 모습
일본이 일제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광산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가운데 일본 니가타현이 사도광산은 에도시대 유적으로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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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니가타현에 위치한 사도광산. / 사진 = 연합뉴스 |
니가타현의 오다 유미코(小田由美子) 세계유산등록추진실장은 12일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언급했습니다.
일본 문화청 문화심의회는 지난달 28일 니가타현에 위치한 사도광산에 대해 "보편적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세계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다음 달 1일까지 유네스코에 사도광산을 공식 추천할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오다 실장은 '사도광산의 보편적 가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1603년~1867년까지 이어진 에도시대의 수작업 금생산 체계라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는 사도광산의 금생산 체계를 설명하며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질과 양의 금을 손으로 캐는 등 전통적인 수공업이 대규모로 장기간 계속된 금 생산 시스템을 보여주는 희귀한 산업 유산"이라고 밝혔습니다. 덧붙여 "이런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사도광산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다 실장의 설명대로 사도광산은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이 산출되던 곳이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며 기계화 시설이 도입돼 근대 광산으로 탈바꿈했고,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사도광산은 태평양전쟁 기간에 최소 2천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됐던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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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의 에도시대 갱도. 사도광산 관리회사가 개미굴 형태의 에도시대 갱도에 당시 수작업을 하는 노동자를 형상화한 인형을 설치해놓았다. / 사진 = 연합뉴스 |
13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현장 취재 결과 사도광산 시설은 대체로 메이지시대 이후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작성한 '금을 중심으로 한 사도광산 유산군' 소개 자료엔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 수직갱도(1877년 완공)가 "(메이지 시대) 구미(歐美)에서 도입된 선진적 광업 기술로 인해 금은 생산량이 대폭 증가해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적인 광산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소개돼있습니다.
2010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추천 잠정 목록에 포함될 당시엔 메이지 시대 이후 시설이 포함됐지만, 2019년부터는 일본 문화청에 제출한 사도광산 세계유산 추천서에 대상 기간을 에도 시대까지로 한정했습니다.
오다 실장은 사도광산의 역사가 메이지 시대와 태평양전쟁 기간까지 포함돼 평가받는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에도시대 생산 체제와 생산 기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도광산의 가치가 명확해졌다"며 "그 이후 거듭 학술적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 국내 (세계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사도광산 등재 추진을 반대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관한 한국 정부의 논평 등 언론 보도가 있었던 것은 알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가 대응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습
니기타현이 사도광산의 메이지시대 이후 시설을 세계유산 추천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조선인 강제노역과 관련한 논란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 정부는 2015년 조선인 징용 현장인 군함도(일본명 하시마) 등이 포함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며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디지털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