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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국내 언론에서는 전혀 소개가 안 됐지만 반도체 업계 인사들에게 입소문을 탄 풍문이 하나 있었다.
미국 서남부 사막지대에 위치한 애리조나주 피닉스시(市)가 아시아의 한 기업에 감사의 뜻을 표하며 도로와 하수도망 등 인프라스트럭처를 깔아주기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또 수혜를 받는 기업이 공교롭게도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의 세계 1위 기업이자 삼성전자의 '숙적'으로 통하는 대만의 TSMC라는 것이다.
20일 매일경제 취재 결과 이는 사실이었다. 블룸버그통신과 대만 타이베이타임스 등 보도를 종합하면 피닉스시는 TSMC를 위해 아낌없는 인프라망 투자를 결정했다. 피닉스시가 최근 의결한 TSMC 전용 인프라 구축 지원액은 무려 2억 달러(2230억원)에 이른다.
TSMC와 삼성전자는 애플, 퀄컴 등 글로벌 고객사들로부터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물량 등을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초미세 공정인 5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급 반도체 칩을 양산하는 초격차 기업들로 오는 2022년 하반기에 나란히 3나노급 양산을 위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할 수 있는 기업이다보니 글로벌 고객사 입장에서는 설계 역량 없이 오로지 위탁생산에만 집중하는 대만의 TSMC에 첨단 AP 제작물량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시장 평가를 보면 올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3분기 점유율은 17%대로 전망돼 53%대를 기록할 것으로 보이는 TSMC에 한참 못 미치는 2위 신세가 될 전망이다.
이처럼 최고 기술을 갖추고도 대만 기업을 따라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삼성은 피닉스시로부터 환대를 받는 TSMC를 부러운 시선으로 지켜봐야 할 판이다.
애리조나주는 미국 전체 국내총생산(GDP) 기여도가 2% 안팎에 불과한 곳으로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TSMC가 지난 5월 애리조나주에 생산시설을 만들겠다고 하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당시 TSMC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중국의 약진을 견제하고자 반도체 등 첨단 IT부품의 대중국 판매를 제약하려하자 자사 최대 고객이었던 중국 화웨이와 거래 단절을 결정하고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자사 최대 고객을 배신하고 미국과 공조를 맞추기로 한 TSMC의 선택에는 대만과 미국의 신(新) 밀월관계라는 지정학적 변화도 함께 고려됐다.
반중파인 차이잉원 총통이 지난 2월 재집권에 성공하고 트럼프 행정부와 중국 견제를 위한 스텔스 전투기 구매 등 유례없는 결속력을 과시하는 상황에서 애리조나주에 대규모 공장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삼성전자는 미·중 갈등 관계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으로 인해 이도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텍사스주에 있는 현지 반도체 생산시설을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지만 삼성전자는 지난 5월 TSMC의 '화려한' 투자 발표를 흉내낼 수도 없다. 자칫 중국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데다 역대 정부 중 가장 뚜렷한 친중 노선을 택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입장도 헤아려야 한다.
그러는 사이 삼성전자는 지난 13일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등에 투입할 인력을 실은 전세기 2편을 보내려다 중국의 일방 취소 통보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지난달 베트남 총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베트남에 반도체 공장을 세워달라"고 호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베트남이 총리 입을 빌어 삼성전자에 집요하게 반도체 공장 투자를 요구한 것은 2018년 10월, 2019년 11월에 이어 이번에만 세 번째다.
삼성전자는 국내 공장 운영에서도 정부와 지자체·지역사회가 만든 그물망 같은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이른바 '송전탑 갈등'으로 불리는 평택 반도체 공장의 전력 공급 문제로 삼성전자는 5년 간 한전과 지역사회(안성시)를 상대하다가 결국 지난해 수 천억원의 전력망 지중화 비용을 전액 삼성전자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마무리했다.
합의 내용을 뜯어보면 과연 삼성전자가 사업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들 만큼 이치에 맞지 않은 양보를 했다. 수 천억원을 들여 추진하는 지중화 사업 완료시점이 오는 2025년이기 때문이다. 사즉생의 첨단화 속도 경쟁을 벌여야 하는 삼성전자가 사실상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지역사회 민원에 굴복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주민 세금 223억원을 끌어들여 대만 TSMC를 위해 도로와 하수도망, 신호등을 설치해주는 미국 피닉스시. 반면 반
한국의 1등 반도체 기업이 대만 TSMC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는 기술과 투자의 문제가 아님을 두 엇갈린 장면이 설명해준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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