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말 중국 시진핑 지도부가 홍콩에 발동한 '홍콩보안법'을 통해 미·중 전쟁의 '대리전 효과'를 만들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리전은 분쟁 당사자가 직접 싸우지 않고 제3자를 내세워 상대방과 싸우게 하는 전략이다. 중동에서 시아파 이란과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 간 갈등이 엉뚱하게도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대표적 사례다.
시진핑표 홍콩보안법을 받아든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이 법을 근거로 역내는 물론 미국에 거주하는 홍콩인 민주인사까지 '수배령'을 내리며 중국의 전쟁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홍콩보안법 발효 초기 '특별지위 박탈'로 맞섰지만 실상은 홍콩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의 이익 침해 문제 때문에 중국과 홍콩 당국의 도발을 꺾을만한 초강력 펀치를 날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8월 들어 홍콩보안법을 이용해 홍콩을 대미(對美) '대리전 수행자'로 활용하려는 의도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8월 1일 해외에 거주 중이거나 홍콩보안법을 피해 해외 체류 중인 야권 인사 6명을 상대로 수배령을 내린 것이다. 내부 정세불안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넘어 이 법을 국제사회 전체에 확대시키겠다는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더구나 6명의 해외 체류 인사 중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시민운동가 새뮤얼 추(42)가 포함됐다. 홍콩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하고 줄곧 LA에서 빈곤 개선 등을 위한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이 2014년 홍콩 우산혁명 지도자 중 한 명인 주야오밍(朱耀明) 목사의 아들이라는 점과 더불어 홍콩민주위원회(HKDC)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지명수배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새뮤얼 추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미 의회를 상대로 홍콩 민주화를 위한 각종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혐의도 적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새뮤얼 추는 이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를 통해 자신이 홍콩 당국으로부터 수배 대상이 됐다는 보도를 접한 뒤 트위터에 "홍콩 보안법 상 '분열 선동'과 '외국세력 공모' 혐의를 받는 것 같다"며 "이는 내가 미국 시민권자이고 이곳에서 25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것"이라고 밝혔다.
홍콩 당국이 미국 본토에 거주하는 미국민을 상대로 지명수배령을 내리자 미 국무부는 발끈하고 나섰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4일(현지시간) 성명에서 "갈수록 중국 국경 바깥으로 자신들의 손길이 미치는 범위를 확대하려 한다"며 "미국과 다른 자유 국가들은 중국 정부가 뻗치는 긴 권위주의의 팔로부터 우리 국민들을 계속 보호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콩보안법을 통해 수배령을 내린 주체는 홍콩 당국이지만 그 모든 배후와 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그는 뒤이어 자신의 트위터에 "미국은 우리 영토를 포함해 중국 밖에서 거주하는 친민주주의 인사들을 처단하려는 중국공산당(CCP)을 규탄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콩을 활용한 중국의 잇단 도발행위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의 최근 대응을 보면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처럼 결정적 한방 없이 비난의 외교적 수사만 가득한 형국이다.
이번 해외 수배령을 발동하기 직전 캐리 람 장관은 9월 6일 입법회(국회) 선거를 1년 후로 전격 연기하는 초법적 권한을 발동했다. 또한 홍콩 선거관리위원회는 조슈아 윙 등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의 주역들을 상대로 입법회 출마 자격을 박탈시켰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적극적은 대응에 나서지 않고 있다.
세계 최대 패권국이자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전통적 역할·위상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가 홍콩 내 법치 훼손과 인권탄압 논란에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외교의 전통적 가치보다는 돈을 더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방위비 부담 문제를 거론하며 독일 등 동맹국들을 상대로 미군 주둔 규모를 줄이는 파탄적 선택을 하고 있다.
이는 영국이 홍콩보안법 발 인권탄압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최근 영국·홍콩 간 범죄인 인도 협정을 무기한 중단시킨 행보에 비춰봐도 소극적이다. 심지어 프랑스는 중국 위구르족 인권탄압 문제에 맞서 국제사회 차원의 조사 개시를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홍콩보안법 발 인권탄압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책인 홍콩 이민자 수용 정책도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쇄국·반이민 정책으로 인해 실제 미국 정부가 홍콩인들을 상대로 발급할 비자 쿼터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의 측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집회 현장에 무리하게 주방위군을 투입하려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의 항명을 야기하고 백인 우월주의 동영상을 리트윗해 인종주의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돈과 물질을 최우선으로 두는 그는 코로나19 백신을 매점매석하고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중국 틱톡 인수협상에서 "거래금액의 일정액을 정부에 제공하라"고 황당
일국양제 시스템을 수호하고 미국과 경제·안보 전쟁에서 완충공간이자 반격의 도구로 홍콩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시진핑 국가 주석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무대응' 전략이 의심될만큼 홍콩 발 중국의 도발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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