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구승자 필다패(躁而求勝者 必多敗)'
바둑 10훈(十訓) 중 하나로 급하게 이기려는 자는 악수(惡手)를 두게 돼 승부에서 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최근 대내외 정책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가 정확히 '조이구승자 필다패' 행보를 닮아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 2016년 힐러리와 대선 경쟁 때보다 낮아진 지지율
대선 석달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 실패에 대한 책임론 등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다.
CNN이 지난 18~24일 여론조사기관 SSRS와 공동으로 실시해 이날 발표한 3개 경합주 여론조사에서 그는 민주당 대선 후보인 바이든 전 부통령에게 모두 밀렸다.
한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은 40.9%에 그쳐 바이든 전 부통령(49.6%)에게 8.7%포인트 뒤처졌다.
2016년 대선 때도 당시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이 정도까지 지지율 격차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다급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7월 들어 각종 파격 정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의 뜻과 달리 대내외에서 상당한 저항이 발생하고 있다.
■ 하버드대·MIT대·상공회의소의 대정부 소송 감행
대표적으로 올해 가을 학기에 온라인 강의로만 수강하는 외국인 유학생의 비자를 취소하고, 강제 출국시키려던 새 이민 규정을 발표했다가 이를 부분 철회했다.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등이 교육계 '건강권 위협'을 이유로 정부에 소송을 내자 화들짝 놀라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이 대학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감염 위기가 현존함에도 정부가 경제 살리기를 위해 꼼수로 대학들을 동원해 무리하게 오프라인 강의를 종용했다고 개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우군인 미 상공회의소 등 재계단체마저 최근 트럼프표 정책을 질타하는 소송을 냈다.
외국인 숙련 기술자에 대한 취업비자 발급 중단이 그것이다.
미 상공회의소는 이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전미제조업협회 등 다른 재계단체와 세를 규합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연방지법에 낸 소송에서 이 단체들은 "수 십만 명의 미국 취업 희망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취업비자 발급 제한 정책은 정부의 권한 범위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 상공회의소가 자국 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소송을 낸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토마스 도나휴 미 상의 회장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왜 상공회의소는 트럼프 행정부에 소송을 낼 수밖에 없었나'라는 제하의 칼럼까지 기고했다.
1997년부터 미 상의를 이끌며 빌 클린턴-조지 부시 2세-버락 오바마-도널드 트럼프 등 4명의 대통령을 상대로 미 기업들의 규제개혁 목소리를 대변해온 그는 "현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은 비즈니스 친화와 거리가 먼 정책으로 엔지니어와 의사, 간호사 등 외국인 노동자 입국을 막게 되면 결국 미국 경제의 성장을 저해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지난 24일에는 의약품 구매에 지불하는 소비자 비용을 낮추기 위한 대통령 행정명령 서명이 이뤄졌다.
이를 두고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잃은 표심을 약값 정책으로 잡으려 한다"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무리한 약가 인하 요구가 의료산업의 혁신·연구개발 투자 의지를 꺾어놓을 수 있다며 정책의 부작용을 경고하고 있다.
약가 재평가 협상 과정에서 산업계와 법적 분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외교·안보 정책 실기···영사관 폐쇄공격, 中의 '팃 포 탯' 대응역량만 키워줘
내치(內治)에서 번목을 야기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악수는 외교·안보 등 외치(外治)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주 휴스턴 주재 중국 총영사관 폐쇄를 결정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내부 반중여론을 고조시키고 외교정책에서 '중국에 당당한 리더'라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국무부가 총영사관 폐쇄 근거로 제시한 각종 사례는 중국의 미국 내 간첩활동 의혹과 명확한 연관성을 갖지 못했다.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을 제시하지 않은 채 휴스턴 중국 총영사관이 백신 관련 간첩행위를 했다고 주장한 최근 사례는 오히려 미국 내에서도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휴스턴 중국 총영사관이 실제 이 같은 백신 탈취 시도를 했다면 미 수사 당국이 카이 웨이 중국 총영사의 신변을 확보할 만큼 중대한 범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카이 웨이 총영사는 아무런 인신구속의 제한 없이 현재 미국과 중국 매체들을 상대로 미국의 공관폐쇄 도발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며 이 이슈를 열심히 부각시키려 했지만 언론 반응도 미지근했다.
CNN의 경우 미국 내 코로나19 대유행 보도에 집중하며 미·중 간 공관 폐쇄 이슈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총영사관 폐쇄 조처가 석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쇼라고 판단한 것이다.
반대로 미국 내 반중여론을 일으켜 지지세를 다잡기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공격이 중국의 기를 살려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2018~2019년 전개된 미·중 무역전쟁에서 중국 시진핑 지도부는 줄곧 트럼프 대통령에게 끌려다녔다.
그러다가 2020년 1월 15일, 마침내 미국 백악관에서 사실상의 항복문서인 1단계 무역합의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 무역합의 내용의 골자는 중국이 성의를 다해 앞으로 2년 간 미국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공산품, 서비스, 에너지 등 상품과 서비스를 현행보다 231조원어치 더 구매하겠다는 것이다.
합의서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요하게 주장했던 지식재산권 탈취와 환율조작 문제에 대해 "방지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중국의 약속까지 담겼다.
총성만 없었을뿐 국익의 최전선에 자리한 통상의 영역에서 시진핑 지도부는 미국의 압박에 못이겨 굴욕적 합의를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 트럼프 대통령의 '공관 폐쇄' 공격을 받아든 시진핑 지도부의 대응 태도는 과거 수세적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통상 미국의 부당한 공격이 있을 때 주베이징 미국 대사를 초치해 항의를 한 뒤 상황을 지켜봤는데 중국 외교부는 이번에 테리 브랜스태드 주베이징 미국 대사를 초치하는 과정마저 생략한채 바로 청두 주재 미국 총영사관 폐쇄 카드를 꺼냈다.
대외적 요식행위를 건너뛰고 바로 맞불작전에 나선 배경에 대해 외교가에서는 "시진핑 지도부가 트럼프발 공관폐쇄 공격을 잘만 대응하면 내부 결속을 다지는데도 유리한 효과를 얻는다는 계산을 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한 외교가 인사는 "중국 외교부가 청두 미 총영사관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뒤 지금까지 CCTV 등 중국 주요 매체들이 이곳에 몰려 일거수일투족을 중국 전역에 내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6개월 전 류허 중국 부총리와 고위 관리들이 백악관에서 병풍처럼 트럼프 대통령 뒤에 도열해 무역합의에 서명한 굴욕과 달리 이번 공관폐쇄 건에서는 당당하게 시진핑 지도부가 트럼프의 외교 협박에 맞섰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홍콩 국가보안법, 위구르 사태 등 인권 문제로 쏟아지는 국제적 압박에서 중국이 마땅히 대응할 명분이 없었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감행한 무리한 공관폐쇄 조처가 중국을 억울한 피해자로 비춰지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동맹국을 상대로 한 미군전력 재배치 문제도 트럼프 대통령의 악수로 꼽힌다.
주독 미군과 주한 미군의 철수 및 감축 문제가 불거지자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매체들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트럼프 행정부의 미군 철수·감축 이슈에서) 혜택을 볼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 '트럼프, 새로운 병력 철수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은 또하나의 관계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캠페인이 휘청거리는 가운데 자제심을 내던지고 병력 철수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런 무리한 지시가 유럽은 물론 아시아 지역에서도 미국의 전략적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고 정면 경고했다.
특히 동맹국을 상대로 잊을 만하면 제기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복적인 미군병력 감축 협박은 '양치기 소년’(The Boy Who Cried Wolf) 효과를 만들어 동맹국에서마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염려를 낳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안보 전문가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오는 주한미군 감축 압박 역시 2020년 11월 미국 대선과 연계된 것으로 대선 전 주한미군 감축 조처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간 트럼프 행정부에 감축 협박을 받은 동맹국 입장에서는 오히려 느긋하게 석 달 뒤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며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실패할지 여부에 따라 원점에서 미 국방부와 후속 대응카드를 검토하면 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편 찰스 블로우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26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정치적 팬데믹 태세전환'(Trump's Nakedly Political Pandemic Pivot) 제하의 칼럼에서 대선을 앞두고 선거 패배 위기에 놓인 트럼프 대통령의 마스크 옹호론 등 태도변화를 꼬집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정치적 카멜레온'이라고 규정하며 "트럼프는 지금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 선거가 100일 앞으로 다가온 중대한 시점에서 지지율이 미끄러지고 있고 많은 이들이 그의 팬데믹 대처를 신뢰·찬성하지 않는다.
팬데믹 경고를 무시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과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 태도를 바꿨지만 11월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위장된 모습을 버리고 다시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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