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매장량 1위'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사실상 0원'이던 휘발유 가격이 30년만에 인상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 휘발유를 수입하기 시작한 데 이어 이번에는 휘발유 보조금을 대폭 축소하기로 한 데 따른 결과다. 남미 산유국에서 정부가 '긴축 개혁' 일환으로 에너지 보조금을 줄이는 것은 '독이 든 성배'로 통한다. 극심한 반(反)정부 시위와 정국 혼란을 불러온 역사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두 대통령 정국'이 1년 넘게 이어지는 베네수엘라가 이번 휘발유 보조금 축소를 계기로 정국 변화를 맞게될 지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 주말 31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정부는 6월 1일부터 전국 주유소 휘발유 최저 가격을 1리터(ℓ)당 5000볼리바르(2.5센트·약 30원)로 인상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베네수엘라의 이번 유가 인상을 '30여년 만의 역사적 변화'라고 평가했다.
이날 타렉 엘 아사미 에너지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6월 1일부터 정부 보조금이 줄어들며 이에 따라 휘발유 값이 1리터 당 5000볼리바르(2.5센트·약 30원)으로 오른다"고 밝혔다. 정부 보조금이 줄어들어 가격이 오름과 동시에 지원 범위도 줄어든다. 장관은 "휘발유 가격이 1리터 당 5000볼리바르로 오름과 동시에 자동차는 한 달에 120리터, 오토바이는 60리터까지만 1리터 당 5000볼리바르에 휘발유를 살 수 있다"면서 "한도를 초과해 휘발유를 사려는 사람들은 이보다 높은 국제 시세에 따라 구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상된 가격에 따르더라도 정부가 지원하는 한도 내에서 휘발유를 사면, 1달러에 40리터를 살 수 있다. 언뜻 보면 매우 낮은 가격이지만 베네수엘라 시민들 부담만 커진다는 야권 비난이 따랐다. 보조금 축소 전 휘발유 값은 1리터 당 1센트 미만이어서 사실상 공짜였기 때문이다. 현지매체 엘나시오날은 시민들이 한달에 버는 돈이 평균 4달러(약 4910원)에 그친다고 전했다.
한편 에너지부는 이날 전국 1800개 주유소 중 고급 휘발유를 취급하는 일부 민간 주유소 200여 곳에 대해서는 1리터당 50센트(610원)에 휘발유를 팔 수 있도록 특별 승인한다고 밝혔다. 1리터당 50센트는 국경을 맞댄 콜롬비아 시세와 유사한 것이라고 에너지부는 설명했다. 다만 야권은 콜롬비아 시민은 베네수엘라 시민보다 한 달에 70배 가량 많은 260달러를 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히 시세만 맞추는 조치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가 보조금과 가격 통제를 줄인 이번 조치는 한 마디로 '시장 자유화 조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사정은 복잡하다. 에너지부 발표에 하루 앞서 30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수도 카라카스 소재 대통령실 미라플로레스에서 대국민담화를 열면서 "정부의 휘발유 보조금은 당분간만 줄어드는 것이며 미국의 제재 탓에 생겨난 휘발유 공급 불안을 정상화하려는 아주 예외적인 조치"라고 강조했다.
반대편에서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31일, 일반 의회(AN)를 소집해 정부의 보조금 축소 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표결을 이끌어냈다고 현지 매체 엘 나시오날이 전했다. 야권 지도자인 과이도 의장은 미국 지지를 받으며 지난 해 1월 부로 '임시 대통령'을 스스로 선언한 바 있다.
이날 과이도 의장과 야권 의원들은 "정부 보조금 축소는 소수 민간 기득권을 배불리려는 조치이며 한달에 4달러를 버는 시민들로서는 더 비싸진 휘발유를 사기 위해 생활고를 겪게될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수엘라에는 야권이 다수인 기존 의회가 일반 의회(AN)로 있고 이와 별개로 지난 2017년 마두로 대통령이 측근을 모아 만든 제헌의회(ANC)가 있다.
이번 조치는 마두로 대통령으로서도 정치적 부담이 크다. 지난 해 10월 '남미 산유국' 에콰도르에서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손잡고 긴축 개혁을 통해 40년만에 에너지 보조금을 폐지하기로 발표하자 전국 단위 시위가 연말까지 이어지면서 정권이 흔들린 바 있다. 30여년 전인 1989년에는 베네수엘라 내 유가 인상이 폭동으로 이어진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발유 보조금을 줄이기로 한 것은 그만큼 휘발유 난이 심각해진 탓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 1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달부터 이란에서 휘발유를 수입해 들여오고 있다. 지난 해 미국이 베네수엘라 국영석유사 PSDVSA를 제재한 결과 자국 내에서 생산·정유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공급 대란이 벌어진 탓이다. 이란도 베네수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 제재를 받는 국가이다보니 베네수엘라는 이란에서 구입한 총 153만 배럴 휘발유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미국 견제를 의식해 해군을 동원해가며 '휘발유 수입 사수작전'에
한편 31일 멕시코 무역회사인 리브레아보르도는 파산을 발표하면서 베네수엘라와의 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리브레아보르도는 "그간 베네수엘라에 식량을 팔고 그 대신 베네수엘라 원유를 받는 식으로 마두로 정권과 거래해왔지만 미국 제재 등 여파로 오히려 9000만 달러 규모 대규모 손실이 발생해 파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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