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편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칠레가 자랑하는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제목이다. 스무 해 넘는 세월을 거치며 '라틴아메리카 경제 모범생'으로 등극했던 칠레가 요즘은 절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거리는 쓰레기로 뒤덮여 건강주의보가 나왔고, 중소기업은 줄줄이 망할 것을 걱정하는 데다 일자리가 대거 사라질 것이라는 우울한 예상이 하루 하루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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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19일(현지시간) `비상사태·통행금지령` 선포를 촉발한 당시 칠레 발파라이소 거리 폭력 사태. [로이터 = 연합뉴스] |
의사 출신인 마냐리치 복지부 장관은 "시위와 파업 여파로 동네마다 쓰레기와 폐기물이 넘쳐나는 바람에 위생 문제가 시민들 건강을 해칠 위험이 빠르게 커졌고, 이런 위기 속에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선 정신분열증을 비롯해 당뇨병이나 HIV, 고혈압 합병증 환자들이 덩달아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복지부는 '수도 산티아고 중심가' 메트로폴리타나와 발파라이소, 안토파가스타 등 6개 지역과 콘셉시온·얀키우 등 2개 시(市) 에 경보를 발령했다. 발파라이소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자 네루다의 집으로 유명한 곳이고, 안토파가스타는 수도 산티아고 인근 항구도시이자 구리 생산지다.
같은 날 산티아고 외환시장에서는 '달러당 800페소'라는 심리적 마지노선 마저 무너졌다. 14일 시장 거래 결과 페소화 가치는 달러당 800.3페소로 떨어졌다. 전날 중앙은행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응한다"는 메시지를 내면서 14일 부로 40억 달러(약 4조6780억원) 규모 통화 스와프를 통해 달러 풀기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제정책을 이끄는 재무부는 '경기 불황'을 경고했다. 이그나시오 브리오네스 재무부 장관은 14일 현지 경제지 디아리오 피난시에로와 인터뷰 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경제 최강국인 우리 나라가 지금은 극도로 힘들다"면서 "지금 상태에서 가장 최악의 조치는 최저 임금을 20 % 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관은 "나라 경제가 굴러가는 속도가 절반으로 떨어지면 일자리도 그렇게 된다"면서 "4주 넘게 이어지는 폭력 상황 때문에 연말 실업률이 10%에 달할 것이고, 일자리 30만개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브리오네스 장관은 장기화된 시위와 파업으로 중소 기업 매출이 급감하고 가게들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 최저 임금까지 올리면 고용도 위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내년에 소위 말하는 기술적 불황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시나리오를 지금 버릴 수가 없는 지경이다"라고 우울한 전망을 냈다.
이날 브리오네스 장관은 에너지청에 가격안정화 대책을 가동하라고 주문했다. 장관은 "휘발유·디젤 주간 평균 가격을 통제할 예정이다. 2주 전부터 휘발유 가격을 동결하라고 주문해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대책을 내는 것"이라면서 "솔직히 말해서 이 대책으로 계속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칠레는 구리 등을 내다파는 자원 부국이지만, 자국 내에서 소비하는 원유 90%를 국제시장에서 수입한다. 달러 대비 페소화 가치가 추락하면 그만큼 페소화로 표시된 원유 수입 가격이 올라 에너지 비용 상승이 불가피하다.
앞서 재무부는 "가장 취약한 중소기업과 서민 살림살이를 중심으로 인플레가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성장 전망치를 낮췄다. 브리오네스 장관은 지난 4일 취임 직후 "시위에 따른 나라 전체 경제 손실이 미국 달러 기준 지하철 부문 4억 달러를 포함해 총 30억 달러(3조4710억원)에 달할 것"이라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2.4~2.9%에서 1.8~2.2%로, 2020년 성장 전망은 기존 3~3.5%에서 2~2.5%로 하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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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불평등 연구자 브랑코 밀라노비치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는 칠레에선 극소수의 슈퍼리치가 GDP의 25%를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 출처 = 밀라노비치 교수 블로그] |
세계적인 불평등 연구자 브랑코 밀라노비치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는 지난 달 말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칠레는 신자유주의 은혜를 입다가 똑 떨어진 '포스터 보이'(화보 훈남)"라면서 "남미 다른 나라에 비해 불평등이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밀라노비치 교수는 "포브스 지가 산정한 전세계 십억만 달러 보유 부자들('슈퍼리치'·2014년 데이터)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칠레 슈퍼리치는 12명인데 그들의 총 자산이 나라 전체 GDP의 25%에 달한다"면서 "러시아나 멕시코보다도 부가 치우친 나라"라고 비판했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빈곤을 줄이려면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정의가 없고 최소한의 연대감이나 응집력도 없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의 결실도 사람들의 눈물과 시위, 총알이 오가는 폭력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칠레는 한 때 '공산주의·독재 정권' 베네수엘라 경제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잘 나가는 모범사례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시민들이 10월 초 정부가 낸 '지하철 요금 30페소(약50원) 인상안'에 반대하면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시위가 소득 불평등 항의로 번지면서 상황이 격화됐다.
시위 정국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난 달 31일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11월 16~17일에 열릴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와 12월 2∼13일 열려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 개최를 포기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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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 시내에서 무장 군인이 넘어진 시위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1970년대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 시민 고문과 납치 등 인권 유린 아픔을 겪은 칠레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군과 경찰의 강경진압 탓에 오히려 시민 반발이 커지고 있다. [로이터 = 연합뉴스] |
하지만 독재정권 시절 만들어진 헌법이 국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바람에 소득 재분배나 복지 정책 같은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상태에서 공공부문 민영화가 무분별하게 이뤄지면서 소득 양극화 문제가 경제 구조에 뿌리내렸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칠레 지니계수는 46.6으로 소득 불평등도가 '국가 디폴트'에 다다른 아르헨티나(지니계수 41.2)보다도 높다.
나날이 불평등 시위가 격화되자 피녜라 대통령은 이달 초 "30일동안 연금·최저임금 20%인상, 노동시간 단축(주 44시간→40시간), 부자세 부과, 약값 인하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 제정한 헌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혼란은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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