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의 대러 추가 제재에 대한 보복 조치로 자국 내 미국 외교관에 대한 대규모 퇴출령을 내렸다.
지난해 말 오바마 행정부가 러시아의 대선 개입 의혹을 문제삼아 미국 내 러시아 외교관 추방 조치를 내렸을 당시 별다른 반발 없이 묵묵히 인내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국영 TV 채널 '로시야 1'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미국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면서 "이 가운데 755명이 러시아 내에서의 활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사에 있어 가장 큰 규모의 외교관 추방 사태'(BBC)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이례적인 조치다. 앞서 러시아 외무부는 지난달 28일 성명을 내고 미국 하원과 상원이 대러 추가 제재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보복 조치로 미국 외교관의 무더기 추방과 별장·창고 등 미국 외교자산 압류 조치를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은 맞제재 조치의 배경에 대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기다릴 인내심이 바닥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오랫동안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기다려왔지만 최근 여러 정황을 볼 때 변화가 단시간에 이뤄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추가 보복조치를 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기대와 달리 악화되자 맞제재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강제 합병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로부터 경제재재를 받아왔다.
트럼프와 푸틴은 서로 공개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며 '브로맨스'를 과시했으나 미국 내에서 러시아 스캔들이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등 트럼프의 가족들이 스캔들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며 특검 수사 선상에 오르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당시 트럼프가 푸틴과 장시간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보도돼 논란을 빚는 등 트럼프 입장에서 더 이상 푸틴과의 우정을 강조하기 힘들어지면서 푸틴의 기대도 실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푸틴이 '이에는 이'식의 맞제재에 나선 것은 미국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라는 지적도 있다.
'파리 기후협약' 탈퇴 등 트럼프가 노골적인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는 동안 러시아는 중국·유럽연합(EU)과의 신(新) 밀월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한 압박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과의 우호 관계는 최고조에 달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서방의 경제재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등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절실하다. 푸틴의 최대 역점 사업 중 하나인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서도 중국 자본이 필요하다.
중국 입장에서도 북한 핵문제와 사드 한국 배치 등을 놓고 미국과 대결하고 있는 만큼 러시아의 지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실제로 양국은 북한 문제와 관련해 '역할 분담을 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로 찰떡 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달 있었던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에 대해 러시아가 "ICBM이 아닌 중거리 미사일"이라고 주장하며 유엔의 새 대북제재 결의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6월 러시아 해군이 처음으로 홍콩에 기항한데 이어 지난달에는 중국 해군이 발트해에서 러시아 해군과 합동 훈련을 실시하는 등 양국 간 군사 협력도 가속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미국의 대러 추가 제재안 가결 이후 파열음을 내고 있는 미국·유럽 관계의 틈도 파고들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미국의 대러 추가제재가 유럽의 에너지 사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독일 등 EU 회원국 기업들이 러시아의 천연 가스 파이프라인 '노르드 슈트림 2' 건설에 자금을 댔는데, 제재로 투자 기업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독일 등 일부 국가들은 미국에 대해 보복 조치 가능성도 경고하고 있다.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핀란드를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의 제재법안은 유럽 동맹국들의 희생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난하며 유럽과 러시아가 공동전선을 펼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강경 대응이 내년 3월 있을 대선을 앞두고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행보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푸틴 입장에서는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여차하면 '신냉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과시해 미국에 대한 자존감을 세워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에블린 파커스 전 국방부 동유럽 담당 부차관보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했던 것처럼 푸틴은 대선을 앞두고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러시아군이 '해군의 날'을 맞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0여 척의 함정과 잠수함이 참가한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가진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이날 군사 퍼레이드에서는 소련 시절 건조돼 대양을 누비던 핵 추진 중순양함 '표트르 벨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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