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덕 책임)’로 상징되는 칼레. 역사적 상징이었던 칼레의 난민촌을 프랑스 정부는 무자비하게 철거했고, 보호자 없는 1500여명의 미성년자들은 프랑스 전역의 난민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철거 이후 방치됐던 이들은 기약 없는 난민수용소 체류 기간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개시된 프랑스 정부의 칼레 난민촌 완전 철거 작전이 개시된 이후 마침내 2일 칼레 난민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프랑스 정부는 이날 칼레 난민촌에 있는 1500명의 보호자 없는 미성년 난민을 버스에 나눠 프랑스 전국 난민 수용시설로 떠나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더는 칼레에서 영국행 신청을 받지 않을 것이고 공언해 영국행을 희망하는 이들의 바람을 묵살했다. 이들은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졌고,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난민에 적대적인 지역으로 수용돼 신변위협 등 불안감에 떨고 있다.
칼레가 지닌 역사적 명성과 중요성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칼레는 영국의 도버까지 거리는 불과 34km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칼레는 영국과 프랑스 간 쟁탈전이 치열했다.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째 되던 해 영국은 칼레를 포위했다. 칼레 시민들은 1년 넘게 영국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국은 칼레 시민들을 놓아주는 대신 귀족이나 부자 등 유지 여섯 명의 목숨을 요구했다. 이에 칼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먼저 목숨을 내놓겠다고 선언한 뒤 여섯 명의 유지가 그를 따르기로 했다. 이들은 모두 약속한 대로 칼레의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유명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로 현생에 부활해 지금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영예의 땅’이었던 칼레는 현재 ‘비극의 땅’으로 전락했다. 내전과 정정불안으로 중동·아프리카에서 탈출한 난민들은 칼레를 영국으로 넘어가는 최종 경유지로 삼았다. 난민들은 칼레를 거쳐 영어 구사가 용이하고 일자리가 많은 영국을 종착지로 삼았다.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유로터널이 있어 선박보다는 이동이 쉽다는 장점도 있다. 2008년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칼레 난민 수는 2014~2015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2000명~3000명 수준이었지만 이후 급증하면서 2015년 10월 6000명을 찍었다. 이후 꾸준히 늘어 1만명까지 육박했고 지난달 철거 당시에는 8000여명에 달했다.
칼레는 지난해 7월 난민 2000여명이 한꺼번에 유로터널에 납입, 200여명이 체포되는 등 아수라장이 된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집중조명됐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계기로 난민촌 철거를 천명하고, 영국은 자국 내로의 난민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와 국경보안협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난민촌 철거 요구가 격화했다. 지난 9월 트럭 운전사와 부두 노동자, 농민과 상인은 트럭과 트랙터 등으로 칼레 주변 고속도로를 막고 난민촌 철거를 요구했다. 트럭 운전사들은 난민이 유로터널에 몰래 숨어들기 위해 자신들의 트럭에 올라타는 데 불만을 보이며 상인들은 난민들 때문에 지역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내년 프랑스가 대선 앞두고 있어 강경일변도의 난민정책이 강화하고 있다. 파리 테러 등으로 프랑스 국민들 사이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하고 있다. 재선을 노리는 올랑드 대통령은 난민촌 폐쇄를 강조하며 민심 끌어안기에 골몰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난민촌 철거가
[장원주 기자 / 임영신 기자 / 김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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