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이 미국 의회에서 예상을 뒤엎고 제동이 걸림에 따라 본격적인 레임덕 국면에 돌입했다.
이에 따라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내 마지막 업적으로 추진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비준에 ‘적신호’가 켜졌으며,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원하는 동력도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의회는 28일(현지시간) 9·11 테러 희생자 유가족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법안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상원 97대 1, 하원 348대 77로 기각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이 의회에서 뒤집힌 것은 지난 2009년 집권 후 처음있는 일이다.
이번 법안은 테러자금 지원 등 9·11 테러 연루 의혹이 제기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상대로 테러 피해자들이 미국 법정에서 소송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에는 미국 법정에서 외국 정부에 대해 면책특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처럼 의회가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압도적으로 뒤집은 것은 오는 11월8일 대선과 함께 실시되는 의회 선거를 앞두고 미국 내 테러 피해자들의 민심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또 최근 뉴욕 미네소타 플로리다 등에서 테러 의혹이 짙은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유권자들 사이에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확산된 탓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애초에 이 법안이 제출됐을 때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를 한꺼번에 매각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갈등을 예고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외교 마찰을 포함해 외국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 유사 법안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했었다.
거부권 기각의 파장으로 레임덕이 본격화하면서 TPP 비준안 처리도 불투명해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 내 비준과 발효를 추진하고 있지만 민주·공화 양당 대선후보가 반대하고 있어 애초부터 난항이 예고됐다. 존 케리 국무장관은 이날 워싱턴DC 윌슨센터 강연에서 “TPP 비준에 실패하면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힘이 약해졌다고 여길 것”이라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이 더 가속화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의회가 케리 장관과 오바마 대통령의 뜻에 따라 TPP 비준에 협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레임덕 증상과 함께 힐러리의 당선을 위해 전폭적인 지지에 나선 오바마 대통령의 영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이번 표결은 의회가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한 이래 가장 당혹스러운 일”이라며 “의원들은 오늘 행동에 대해 자신의 양심과 지역구민들에게 답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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