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가 어떤 직업인지 몰랐어요. 단지 남편이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퍼스트레이디'라는 평가를 받았던 낸시 레이건 여사가 별세했습니다. 미국 40대 대통령 고(故)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6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자택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4세.
1981~1989년 퍼스트레이디 시절 낸시 여사는 레이건 전 대통령 최측근 조언자이자 백악관의 막후 실력자였습니다. 특히 레이건 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1981~1985년)보다 두 번째 임기(1985~1989년)에 영향력이 두드러졌습니다.
1986년 레이건 정부가 공식 외교 방침과 달리 이란에 불법 무기를 판매하고 판매대금 일부를 니카라과 반군에 지원한 사실이 드러난 '이란-콘트라 스캔들' 당시 백악관 참모진은 모두 정면 돌파를 주장했으나 낸시 여사만이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사과할 것을 요구해 정권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외교 참모진의 주장과 달리 당시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주문했던 것도 낸시 여사였습니다.
백악관 인사에도 정통해 주요 인사를 교체하는 데 결정적인 조언을 했습니다. 낸시 여사는 백악관 비서실장을 해고한 직후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비서실장을 원하는 것이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하는 비서실장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영부인으로서 낸시 여사가 가장 주목받은 업적은 '아니라고 말하라(Just say no)' 운동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약 퇴치 캠페인으로 미국 청소년들을 마약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30개국 영부인들을 초청해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시절에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 돕기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귀국하던 날 공항에 나가 이들을 처음 맞이한 사람이 낸시 여사였고, 가족들까지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대통령 퇴임 후 레이건 전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낸시 여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낸시 여사는 극진한 간호와 함께 조지 부시 행정부에 알츠하이머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낸시 여사는 이를 시작으로 "시간은 짧고, 인생은 소중하다"며 알츠하이머병 퇴치 운동을 벌였습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93세였던 2004년 폐렴 합병증으로 타계했습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과 낸시 여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마미'와 '로니'로 부를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과시했습니다. 낸시 여사는 "내 인생의 시작은 '로니'를 만난 이후부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낸시 여사는 백악관 입성 초기 영화계 친구들을 초대해 연일 파티를 벌이고 값비싼 식기와 의류를 사들여 '낸시 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1981년 3월 레이건 전 대통령이 총격을 받은 후부터 헌신적인 간호를 통해 멀어졌던 미국인들의 마음을 돌렸습니다. 1984년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재선에 나섰을 때는 "더 이상 남편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며 재선에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낸시 여사 별세 소식에 미국 정치권에서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부는 "온화하고 관대함의 자랑스러운 본보기"라며 "퍼스트레이디로서 역할을 재정립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밝혔습니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과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낸시는 자애로운 퍼스트레이디면서 자랑스러운 어머니였으며, 남편인 '로니'에 대해서는 헌신적인 부인이었다"고 칭송했습니다.
낸시 여사는 1921년 뉴욕에서 태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