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긴 설날 연휴에 모두가 들떴지만 서울 여의도 증권맨들은 가족을 만나는 게 달콤하지만은 않다. 업계 불황에 성과급 지급이 크게 줄어 조카들 세뱃돈마저 부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 굴릴 곳이 없다'는 친지의 투정과 투자 종목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어깨가 무겁다.
◆무너진 업황에 성과급 축소…조카들 세뱃돈도 부담
"부장님은 2008년 당시에 연말성과급으로 1000만원, 설 '보너스'로 기본급의 100%를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랑 지금이랑 분위기가 정말 다른 거 같아요.”
금융투자회사의 영업직원으로 일하는 A씨는 "조카가 여럿이라 세뱃돈 쥐어주는 것도 부담”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2000년대 후반 세뱃돈으로 수백만원을 지출했다고 하는 상사의 얘기가 자신의 현재 상황과 크게 대비된다는 것이다.
최근 주식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증권 관련 회사들의 실적도 뒷걸음 치면서 직원 복지도 크게 축소됐다.
설 보너스 대신 일부 회사들은 귀성비와 경로효친비 등 명목으로 30만~8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직원들에게 상품권, 굴비나 과일 세트 등 선물만 전하는 경우도 있다. 아예 설 선물을 받지 못한채 빈손으로 귀향길에 올라야하는 직원들도 많다.
직원들은 지난해 불어 닥친 '칼바람'을 감안하면 자리를 지킨 것이 보너스라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3년간 금융투자업계를 떠난 인력이 7500명에 달하는데다 추가 구조조정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 직원인 B씨는 "작년에 회사를 떠난 동료가 수백명”이라며 "연말 보너스를 기대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올해는 뭐 좀 살만한 종목 있을까?”
한 금융투자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C씨는 연휴 동안 투자할 만한 종목을 추천해달라는 요구를 수십번씩 듣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일가친척이 모이면 돈을 벌 곳이 없다는 한탄이 나오고 가족들의 눈과 귀가 자연스레 C씨에게 쏠린다는 것이다.
"은행에 넣어놔도 이자가 많이 붙는 것도 아니고, 월급은 안 오르고… 투자처를 물어보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어른들은 물론이고 조카까지도 혼자만 수익 내지 말고 같이 좀 하자고 말을 해요.”
하지만 이런 질문에 C씨는 웬만하면 '잘 모르겠다'라고 잘라 말한다고 귀뜸했다. 지난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종목을 얘기했다가 몇몇 종목이 하락해 손실을 본 지인이 있기 때문이다.
C씨는 "최근 주식 시장이 박스권에 갇히면서 추천 종목의 상승률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었다”며 "나 때문에 가족들이 손실을 봤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컸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금융투자회사에 근무중인 D씨도 목돈을 투자한 가족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며 회상했다. 지난해 설날 처가에서 한 게임 종목에 대해 "이 종목은 꼭 오른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D씨의 처남은 비상금으로 갖고 있던 1000만원을 이 종목에 투자했고 주가가 강세를 보이자 흐뭇해했다. 하지만 한 달 뒤부터 주가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처남은 하루에 몇
D씨는 "그때 처남과 사이가 벌어져 한동안 큰 고생했다”면서 "1000만원이 400만원이 됐으니 나를 미워할 만했다”고 전했다. 이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매경닷컴 이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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