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선동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현역 시절 명성에 걸맞게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그 중 하나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고사를 현실에서 만든 것이었다.
선 전 감독은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할 때에도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가 기가 죽어 제대로 야구를 하지 못했다는 믿겨지지 않은 이야기를 만든 인물이다.
↑ 양의지가 경기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감 만으로 결승타를 이끈 주인공이 됐다. 사진=천정환 기자 |
주인공은 NC 양의지(35)였다.
양의지는 11일 잠실 두산-NC전에 선발 출장하지 않았다. 체력 관리 차원의 배려로 받아들여졌다. 경기 내내 양의지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런 양의지가 경기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2-2로 팽팽히 맞선 9회초 NC 공격에서였다.
NC는 선두 타자 박민우가 우전 안타로 출루한 뒤 도루를 성공시켜 2사 2루 기회를 잡았다. 타석엔 마티니가 들어섰다.
마티니는 타율 0.286 13홈런 60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NC의 주포다.
경기를 중계한 이순철 SBS 해설 위원은 "정석대로라면 여기서 마티니를 어렵게 승부해서 거른 뒤 다음 타자와 승부하는 것이 옳다. 마티니는 오늘 경기서 안타가 없었지만 최근 NC 타자들 중 가장 잘 치고 있는 타자다. 베이스를 채우고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단서가 있었다. 양의지가 대타로 등장할 것인지가 포인트라고 했다.
이 위원은 "지금 양의지가 어떤 상태인지 여기선 잘 모르겠다. 다만 어딘가에서 대타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면 두산이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양의지가 2사 1,2루서 대타로 등장한다는 건 대단한 압박이 될 수 있다. 양의지를 의식한다면 두산 배터리가 마티니와 승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 했다.
이 위원의 분석은 정확했다. 홍건희-박세혁으로 짜여 진 두산 배터리는 마티니와 승부를 택했다. 결과는 적시타였다. 마티니는 우전 안타를 쳤고 2루 주자 박민우는 여유 있게 홈을 밟았다. 이날 경기의 결승점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덕아웃의 양의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을 수도 있고 경기에 집중만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경기에 나서지 않은 양의지가 경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양의지의 무게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의지는 올 시즌 타격 성적이 썩 좋지 못하다. 타율은 0.262에 불과하고 홈런도 11개를 치는데 그치고 있다.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산의 머릿 속엔 끝까지 양의지가
선동열 효과의 재현이었다고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NC는 양의지 카드를 품에 안고만 있었고 두산은 그런 양의지가 두려워 빠른 승부를 펼치다 결승점을 내주고 만 셈이 됐다.
[정철우 MK스포츠 전문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