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포츠클라이밍의 간판’으로 떠오른 서채현(19)이 지난 11일 열린 올해 첫 월드컵(스위스 마이링엔) 볼더링 부문 11위에 올랐다. 지난해 9월 세계선수권 당시 37위였으니 결과적으로는 26계단이나 올라섰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서채현의 부친이자 스포츠클라이밍 대표팀을 이끄는 서종국 감독은 “채현이가 ‘목표를 높게 잡을 걸 그랬다'고 하더라. 이번 대회 목표를 20명 안에 드는 준결승 진출로 잡았는데 그걸 달성해서 마음이 풀어져서인지 6명 안에 드는 결승 진출을 하지 못한 것 같다더라. 존 1~2개 차이로 결승 진출을 하지 못해 채현이가 많이 아쉬워 했다”고 밝혔다.
서채현은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리드 챔피언에 올랐지만, 볼더링에선 아직 도전자다. 서 감독은 “리드가 육상으로 치면 3,000~5,000m 장거리지만, 볼더링은 400~800m 단중거리라 볼 수 있다. 채현이가 해외 선수들에 비해 상체 근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외견 상 드러났는데, 이 부분을 앞으로 보완해야 한다”며 “리드를 통해 기본기를 탄탄하게 했으니 멀지 않은 시간에 볼더링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다음 월드컵은 5월 열리는 서울 대회다. 발전 속도가 빠른 서채현은 홈 그라운드에서 결승 진출을 노린다.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은 보통 상반기에는 볼더링 중심, 하반기에는 리드 중심으로 시즌이 열린다. 서채현이 올 상반기에 볼더링에서 깜짝 성적을 낼지 관심이다.
리드(Lead)는 안전벨트를 달고 15m의 경기벽을 정해진 시간 안에 누가 더 높이 오르는 지를 겨루는 종목이다.
볼더링(Boulder)은 주어진 시간 안에 4~5m 경기벽의 여러 코스를 등반하면서 해결한 과제수와 등반 중 시도 횟수를 종합(존Zone과 탑Top 포인트)해 겨루는 종목이다. (※이외에 말그대로 15m 경기벽을 누가 가장 빠르게 오르냐를 경쟁하는 스피드Speed 종목이 있는데, 서채현의 주력이 아니기에 논외)
서 감독의 설명처럼, 리드가 모든 기본기를 총동원해 안정적으로 높은 곳을 올라야 한다면, 볼더링은 창의력과 더 많은 근력과 탄력을 발휘해 짧은 거리를 통과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리드를 정복한 서채현은 볼더링 기량 향상에 힘을 쏟고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리드와 볼더링을 합쳐서 콤바인(Combined), 우리 말로 하면 ‘복합’이라 부르는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는 이 복합으로 메달을 겨루는 방식을 취한다. 리드와 볼더링, 두 종목을 모두 잘해야 메달 획득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도쿄올림픽에서는 복합에 스피드 부문까지 포함됐었지만, 올해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과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는 복합에 스피드가 제외됐다. 서채현은. 최연소로 참가한 도쿄올림픽 결승에서 스피드 부문 최하위를 기록했었으니 스피드가 빠진 게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간 중장거리 선수가 단거리까지 뛰어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MBN 스포츠 전문 토크쇼 ‘스포츠야’에 출연한 서채현은 이와 관련해 “대부분 선수가 리드와 볼더링을 함께 하지만, 스피드는 아예 다른 종목으로 생각한다. 많은 선수가 기존 올림픽 방식(콤바인에 스피드 포함)에 부담과 불만을 많이 느꼈다”고 속내를 밝혔다.
서채현을 스포츠야에 초대하기까지는 지난해부터 5개월가량 걸렸다. “운동을 해야 해서 날짜를 잡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서 감독은 “스포츠클라이밍 훈련을 하면 보통 6시간 이상을 한다. 흐름을 놓치면 뒤처지는 종목 특성상 매일 꾸준히 해야 해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회마다 코스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때마다 대응하기 위해선 몸도 단련하고 머리도 잘 써야 하니 훈련을 자주 오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 고교를 졸업한 서채현은 그래서 올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오는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목표로 하는 금메달 획득을 위해서인데, 대학에 다니면 운동에 집중은커녕 오히려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조금 더 운동에 집중하자는 생각에서 결정을 내렸어요. 대학에 가면 이도저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업팀을 선택한 친구가 ‘대학에 가지 않은 게 아쉽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아쉽지가 안거든요. 지금은 운동하는 게 재미있어서 후회는 없어요. 해외 등반도 마음대로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특성화 고교인 서울 신정고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던 서채현은 대학 진학은 은퇴 이후에 생각하겠다고 했다.
서채현은 ‘아시안게임 금메달 후보’라고 묻자 수줍게 “세계에서는 모르겠지만 아시아권에서는 확실히 3위 안에는 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본인의 위치를 잘 알기에 자신감이 넘친다. 막연하지만 “파리에서는 금메달은 모르겠지만 메달은 가능할 것 같다”고도 말했다.
서채현은 단기 목표인 올해 항저우아시안게임을 마치면 곧바로 장기 목표에 돌입한다. 2024년 파리올림픽 메달 획득이다. 앞으로 2년 동안 리드에선 더욱 완성도를 높이고, 볼더링에선 부족한 점을 채워가야 한다. 경험과 근력 보완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선 충분한 지원이 필수여서 현재 실업팀 입단을 모색 중이다. 서 감독은 “여러 얘기가 오가고 있어서 멀지 않은 시간에 입단이 결론날 것 같다”고 말했다.
부친인 서 감독이 지난해부터 대표팀 감독을 맡은 건 ‘파리올림픽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행운이다.
“어릴 때부터 아빠한테 전문 훈련을 받아와서 그냥 믿고 따라가요. 대표팀에서 함께 하니까 더 좋아요. 엄하시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고 반반인데,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선수들과 다같이 있을 때 ‘감독님’이라고 호칭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가장 어려워요.”
서채현의 부친 서 감독은 아이스클라이밍 국가대표 출신, 모친 전소영 씨는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출신이다. 부모에게서 클라이밍 DNA를 물려받은 셈이다. 엄마 아빠를 따라 유년 시절부터 클라이밍을 시작했으니 ‘조기 교육’도 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노력을 더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래도 클라이밍 특성 상 훈련도 많은데, 특히 손가락 끝을 많이 쓰게 돼요. 그래서인지 지문이 닳아서 공항에 갈 때면 지문인식기가 인식이 안되서 얼굴인식을. 하곤 해요. 요즘 훈련에서는 근력을 많이 키우려고 하는데, 턱걸이를 많이 해요. 무게를 달고 하곤 하는데 40kg 중량을 달고 할 때도 있어요. 무게를 빼고 하면 30초에 30개는 하는 것 같아요.”
서채현의 롤모델은 국내에 스포츠클라이밍을 널리 알린 김자인(34)이다. 그래서 ‘김자인 키드’를 자처한다.
김자인이 누구인가. 16세 때인 2004년 아시안선수권 금메달을 따내며 혜성처럼 나타나 2009년 월드게임 은메달, 2012년 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권 기량을 보여줬다. 특히 월드컵에서는 2009년 체코 대회를 시작으로 29차례 금메달을 땄다. 스포츠클라이밍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결혼 후 지난해 출산했고, 최근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며 현역 연장 의지를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런 김자인이란 큰 선수를 넘는 게 서채현의 마지막 목표다.
“자인 언니는 존경하는 선수에요. 자기 관리도 잘하시고, 사람들 대하는 모습도 굉장히 멋있어요. 이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저 어릴 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했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선발전에
운동이 너무 좋아 다른 건 딱히 생각나지도 않는다는 ‘스파이더 걸’, ‘거미소녀’ 서채현. 어린 나이지만 벌써 인생의 절반을 암벽에서 보냈다고도 한다. 성공하는 방법이라는 ‘1만시간의 법칙’도 넘어선지 오래다. 즐기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또다른 ‘월드클래스’의 탄생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국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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