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7일) 한일전 68주년을 맞아 보도한 ‘1954년 최초의 한일전 득점 기록 미스터리...“이제라도 바로잡아야”’ 기사는 방송 리포트 특성상 자세하게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이 ‘공간’을 통해 다소 길더라도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리포트 참고 : https://sports.news.naver.com/news?oid=057&aid=0001647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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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3월 7일 스위스월드컵 예선 13조 1차전 후반전 득점자 표기에 관한 내용이다. 방송 리포트에 언급했다시피, 당시 한일 양국 보도에서 후반전 득점 기록은 모두 상이하다. 대한축구협회가 당시 신문 보도를 공식 기록으로 삼은만큼 어떤 보도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국 신문 보도부터 확인해보자. 먼저, 경향신문이다. 경향신문부터 꺼내는 이유는 당시 이지찬 기자가 선수단에 포함돼(※요즘으로 치면 풀 취재 개념) 현장 취재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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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1954.3.9. ‘축구대한의 쾌기염 오대일로 승리’11 |
‘후반전에 들어가 양팀선수는 흙투성이가 되어 피아 공방전이 지렬한 가운데, 한국팀의 최광석 군의 신속한 슛이 꼴인되어 3대1로 한국팀의 득점은 증가되어 우리축구단은 용기백배 맹호같이 일본측 꼴로 시종쇄도하였다. 그리하여 후반전도 이미 시간이 반이상 지나게 되니 일본팀은 기진맥진하고 있는 순간 한국팀 최정민군이 정면으로 잡은 뽈을 그대로 슛하여 네 번째의 득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최군의 두 번째의 슛은 경기가 끝날 2분전 한국선수의 묘기를 보여주어다 꼴되어 5대1로 다었고.’(경향신문 1954.3.9. ‘축구대한의 쾌기염 오대일로 승리’)
정리하자면, 경향신문의 후반전 득점자는 순서대로 최광석, 최정민, 최정민이다. 득점 시간은 불분명하다.
다음은 동아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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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54.3.8. ‘오대일로 대승! 어제 한일축구제일전서’ |
‘(후반) 23분만에 한국측 코너키ㄱ(킥)을 얻어 RW 최광석군 키ㄱ(킥)한 것을 CF 최정민군 짬푸헤딩으로 보기좋게 꼴인. 이어 38분 CH 민병대군의 패스를 CF 최정민군 받아가지고 다시 LI 정남식군에 패스한 것을 정군 페날틱에리아 부근에서 강슛 꼬ㄹ(꼴)인으로 한국군 4대1로 일본군을 리드하고 자신만만하게 계속. 다시 42분에 정남식군의 패스를 CF 최정민군 슛팅한 것이 성공하여 5대1로 일본군을 압도하였다.’(동아일보 1954.3.8. ‘오대일로 대승! 어제 한일축구제일전서’).
동아일보 기사를 정리하면, 후반전 득점자는 최정민(후반 23분), 정남식(후반 38분), 최정민(후반 42분)이다.
국내 신문 중 마지막으로 조선일보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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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54.3.9. ‘한국팀 5대1로 쾌승’ |
'(후반) 20분에는 RW 최광석군의 문전에 센터링한 것을 RI 성낙운군이 헤딩으로 꼴인시켜 3대1로 스코어가 벌어저 더욱 기세를 올렸고 37분에는 CF 최정민군에게 좋은 찬스가 나서 단독으로 닷슈하다가 강슈ㅅ(슛)한 것이 꼴인되어 4대1. 계속해서 40분 RW 최광석군의 정민군이 따라들어가면서 슈ㅅ(슛)한 것이 또한 꼴인되어 5대1의 결정적 스코어로 벌어졌다.'(조선일보 1954.3.9. ‘한국팀 5대1로 쾌승’)
조선일보 기사를 종합하면, 성낙운(후반 20분), 최정민(후반 37분), 최정민(후반 40분)이다. 성낙운이라는 새로운 득점자가 나온다. 성낙운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그렇다면, 대한축구협회는 어느 신문의 기록을 참고한 걸까. 바로 동아일보 신문 기사다. 축구협회 홈페이지에 보면, 최정민(후반 23분), 정남식(후반 38분), 최정민(후반 42분)이 후반전 득점자로 기재됐다. 이에 대해 한국축구 역사 기록의 산증인인 송기룡 대한축구협회 국장(마케팅팀 매니저)는 이런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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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기록 |
“대한축구협회 자체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신문마다 다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여러 검토하고 나서 그나마 가장 정확할 거 같다고 추정되는 신문기사를 인용을 했다. 동아일보는 현지의 라디오 방송 기록을 갖고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 현지 중계 방송이 나름대로 정확하지 않을까 판단을 해서 최종적으로 동아일보 기록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서울방송국에서 일본으로 급파돼 라디오 실황중계를 했던 양대석 아나운서의 코멘트가 정확하다고 판단해 이를 참고한 동아일보 기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운서와 비슷한 위치에서 취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향신문 취재 기자의 현장발 기사를 선택하지 않은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조선일보 기사 역시 ‘도쿄지부발’ 표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현장 취재인데, 이 역시 고려하지 않은 점도 의문이다. 물론, 축구협회의 공식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런 결정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일본 신문 보도는 어땠을까. 원문 그대로 옮기기 힘들어 득점자만 정리해본다.
요미우리신문은 후반전 득점자를 최정민, 최광석, 정남식 순으로 썼다. 아사히신문은 후반전 득점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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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刊スポーツ 1954.3.8. '韓国第1戦に圧勝' |
특이한 건, 스포츠전문지인 닛칸스포츠 보도인데, 성낙운, 최광석, 정남식을 후반전 득점자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앞의 조선일보 기사처럼 성낙운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또 하나는 최정민의 득점을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백만불짜리 다리’로 불리며 아시아를 호령한 스트라이커 최정민은 이 때를 기점으로 승승장구했는데 득점자가 아니라니 참 아이러니컬한 대목이다. 대한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최정민은 당시 2골을 넣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철저한 기록 관리로 유명한 일본의 서적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나가마츠 후토시 일본축구협회 직원으로부터 전해받은 ‘일본축구사:일본대표의 90년’(日本サッカー史:日本代表の90年, 2007년)에서는 최정민(후반 15분), 최광석(후반 32분), 정남식(후반 35분)으로 표기된다. 일본 A매치 기록을 철저하게 분석했다고 소개되는 책인데, 요미우리신문 기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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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サッカー史:日本代表の90年 |
1990년대 당시 양국 출전 선수들을 인터뷰한 역작 ‘한일 킥오프의 전설’(日韓キックオフ伝説, 宿命の対決に秘められた「恨」と「情」, 1996)은 ‘신문 8종류를 모두 살펴봤지만 모두 달라 특정할 수 없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저서로 그해 일본에서 제7회 미즈노스포츠라이터상을 수상한 오시마 히로시 선생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성낙운 선생은 당시 중계 아나운서로부터 경기가 끝나고 가장 잘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득점 관계는 불분명한데, 당시 득점자로 표기된 인물들 얘기를 모두 들어보면 한국은 당시 10대1 정도로 이기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서로 득점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경기에 눈과 비가 내려 진흙탕 속에서 열렸는데, 문전에서 서로 뒤엉킨 상황에서 슈팅을 했기 때문에 누가 득점했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최광석과 성낙운은 체격과 외모가 비슷한 면도 있었다.”
당시 경기를 취재한 것으로 알려졌던 전 산케이스포츠 편집국장 가가와 히로시(98세) 선생과도 연락이 닿았으나 “당시 경기 취재를 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워낙 고령이라 기억하지 못한 듯 했다. 당시 첫 한일전에 출전한 가가와 다로의 친동생인 가가와 선생은 월드컵 10회 취재 등 여러 공로를 인정 받아 2015년 FIFA 회장상을 받는 영예를 누린 인물이다.
그럼, 역사적인 최초의 한일전의 불분명한 득점 기록을 방치해야 할까. “영원한 미궁”이라는 송기룡 축구협회 국장 말처럼 풀 수 없는 숙제일까. 한국 스포츠 역사문화를 활발하게 연구 중인 이종성 한양대 글로벌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그럼에도 ‘역사바로잡기’를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오늘(3월 7일)이 사실 1954년 3월 7일 역사적 경기가 있고나서 굉장히 중요한 날인데 반드시 바로잡아야 될 문제인 것 같다. 이런 것부터 정리를 해나가는 게 한국축구 발전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아시아축구에도 역사바로잡기라는 측면에서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중략) 공식 기록상에서 성낙운이 득점 표기가 안 되어있는 걸 봤을 때 후손을 위해서라도 명확하게 바로 잡을 필요가 있겠고, 무엇보다 이 경기를 통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선수로 부상한 최정민이라는 스트라이커가 일본 자료에 의하면 득점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 부분도 사실 관계를 확인해서 바로잡아야할 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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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80번째 한일전 |
올해는 2002 한일월드컵 20주년을 맞은 해다. 대한축구협회는 오는 6월 성대하게 기념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겸해 성대한 축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축구협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일 양국 협회가 2002 한일월드컵을 공동개최했을 때처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첫 한일전 기록을 명확히 하는 작업을 해서 결과가 어떻든 성과물을 내놓는다면 아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특히나’ 더욱 그럴 것이다. 역사 기록은 한번 굳어지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1954년 3월 7일 한일전
경향신문 : 최광석, 최정민, 최정민
동아일보 : 최정민, 정남식, 최정민
조선일보 : 성낙운, 최정민, 최정민
요미우리신문 : 최정민, 최광석, 정남식
아사히신문 : 미표기
닛칸스포츠 : 성낙운, 최광석, 정남식
일본축구사 : 최정민, 최광석, 정남식
<대한축구협회 : 최정민, 정남식, 최정민>
[국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