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人사이드'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고,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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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카락에 안경을 쓴 여중생.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평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학생은 우리네 부모님들이 하던 말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를 들으며 자라 축구, 수영 등 안해본 운동이 없이 커왔다. 그런데, 이 평범한 학생은 이상하게도 누구나 하는 평범한 운동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TV에서 아이돌들이 하는 댄스에 팍 꽂혔다. 운동한다 생각하고 아이돌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해서 자존감도 자신감도 뚝 떨어진 시기. 따돌림도 당하고, 괴롭힘도 당하던 시기에 기댈 곳이었다.
춤추다보니 취향이 확실해졌다. 섹시 여성 아이돌 보단 격렬한 남성 아이돌 안무가 끌렸다. 춤의 세계에 더욱 빠져들었다. 춤은 내 친구, 춤에 대한 탐구의 연속이었다. 결국, 춤 세계의 끝, 갈데까지 갔다. 브레이크댄스라 불리는 극단의 댄스, 비보잉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을 끊고 본격적으로 춤 세계에 입문했다. '이거 하나면 '짱'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하면서.
한번 빠진 댄스의 세계에서는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던 부모님도 슬슬 걱정하시더니 '안되겠다' 싶으셨던지 학원비를 대주지 않았다. 여중생은 오기가 생겼다. '연습할 공간이 없으면 어떠랴. 세상이 곧 무대인데.' 놀이터에서 몇시간씩 춤과 놀았다. 지루하던 일상은 활기가 넘쳐갔다. 춤을 추니 성적도 쑥쑥. 부모님 생각도 바뀌었다. '공부도 춤도 잘 해다오.'
학교 수련회에서 '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늘 구석진 곳에 있던 여학생이 무대에 나선 것도 놀라웠는데, 춤 하나로 완전히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었다. 이쯤되니 데자뷔 같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빵 셔틀'하던 유약한 현수(배우 권상우)가 집에서 오랜 기간 쌍절곤 맹연습을 하며 벼르고 벼르다 학교에 가서 괴롭혀온 '일진'들을 때려눕히는 모습. 그게 떠올랐다.
위 내용은 7~8년 전 이야기다. '라떼는 말이야', '학교의 레전설' 같은 스토리다. 그럼, 그때 여중생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예고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꿈을 펼치고, 지금은 댄스보컬 학원 YGX에 들어가 꿈을 실현하는 중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력이 있다. 바로 브레이킹 여자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주인공은 춤 하나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김예리(22)다. 올해 9월 열리는 항저우아시안게임에 처음 신설된 브레이킹 종목에 여자 국가대표로 참가한다. 2년 뒤 파리올림픽 때도 나갈 가능성도 있다. 브레이킹이 파리올림픽에도 정식 종목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브레이크댄스도 아니고, 브레이킹이란 용어가 갑자기 튀어나와 궁금한 분들이 있을 수 있겠다. 흔히 대중은 브레이크댄스(Break dance)로 알고 있고, '꾼'들 사이에선 비보잉(B-boying)이라 불렸는데 말이다. 이유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면서 댄스도 빼고 남성적 표현이 들어간 비보잉도 빼고 브레이킹으로 종목명을 명명했기 때문이란다.
김예리는 사실 지난해 11월 국가대표가 되기 전에 전에 떴다. 지난해 8월부터 3개월 간 케이블채널 Mnet에 방영된 댄스 경연 프로그램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스우파)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이었다.
갖가지 스토리로 가득한 김예리를 그래서 'MBN 스포츠야'에 초대했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선수일까 궁금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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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를 위해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를 찾은 김예리는 멀리서 봐도 '김예리'였다. 국가대표 롱패딩에 모자, 마스크로 싸맸지만, 얼핏 보이는 외모에선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비범함이 흘러나왔다.
스튜디오에서 겉옷을 모두 벗자 짧은 노란색 머리카락에 부리부리한 큰 눈,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김예리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셀카' 찍자고 난리였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김예리 선수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스우파' 안봤어요? 난리났었잖아요!"
김예리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다는 듯 갖가지 표정과 포즈로 취하며 셀카를 찍어줬다. '프로야구, 축구 선수도 아닌데, 인기가 이 정도였어?'라며 적잖이 당황했는데, 김예리은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인기를 실감하느냐'고 첫 질문을 던졌는데, 김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대중교통을 평상시처럼 타고다니기가 어려워졌요.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오는데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사진 찍어달라고 요청하시기도 하고, 지하철 안에서 알아보시는 분도 여럿 계셨고요. 그렇다보니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항상 싸매고 다녀요."
'옛날 사람'들은 모르는 요즘 말로 하면 'Z세대 스타' 김예리였다.
김예리는 '그냥 즐기자', '브레이킹을 알리자'는 마음에 지난해 '스우파'에 출연했다고 했다. 생각지도 않게 방송이 대박이 나면서 그후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직후에 사상 첫 브레이킹 국가대표 선발전(브레이킹 K 파이널)을 통해 태극마크까지 달았으니 불과 4개월 사이에 '극적인 변화 시즌2'를 맞은 것이었다. 거들먹거릴 법 하지만, 김예리는 차분하고 무덤덤하다.
"당연하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째됐건 국가대표 선발전 할 때부터 '내가 뽑혀서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고, 평소처럼 '내가 할 일이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하 듯 '국가대표'로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량이 '톱 레벨'에 오른 스포츠선수들과 인터뷰하면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천하의 김예리도 국가대표 선발전은 살짝 떨렸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등을 해야 본전인 거에요. 그래서 못하면 망하는 그런 상황이였던 거에요. 그런 부담 속에 그동안 대회 중에 가장 많이 떨었어요. 보통 대회 때 떨지 않는 편인데, 선발전 때는 가는 길부터 (심장이) 쿵쾅하는 거에요. 몸에 힘이 잘 빠지기도 해서 안 쉬고 움직이고 그랬었는데, 제가 1등을 하니까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포커 페이스'로 열연(?)을 펼친 김예리는 1대1 배틀 형식으로 벌어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심사위원 5명이 평가한 기술·수행력·창의성 등을 통해 최종 승자가 됐다.
놀이터에서 춤 추던 김예리가 이제는 진천선수촌에서 놀게 된 것이다. 함께 국가대표에 선발된 여자부 전지예, 남자부 김종호, 최승빈과 함께 4월부터 진천선수촌을 춤으로 뒤집어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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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리는 지난 5일엔 낯선 진천선수촌 훈련 개시식에 참여해 타 종목 국가대표들의 훈련 모습도 보고, 그 앞에서 멋진 공연도 펼쳤다.
선수촌에선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일부 선수가 다가와서 알아보고는 셀카를 찍자는 선수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스타들의 스타' 느낌이었는데,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도쿄올림픽 3관왕' 안산 양궁 선수도 선수촌에 있었을 거란 얘기에 눈이 번쩍 띄이며 안산과 셀카 찍어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금메달리스트 얘기를 하면서 메달 획득에 대한 포부도 밝혔다.
"진천선수천에 갔다오면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표를 두고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알게 됐고, 첫 국가대표니까 첫 시작을 잘 열어줘야 하기 때문에 이번엔 욕심을 내봐야겠다 싶더라고요."
꿈은 크게 가지라고 했지만, 금메달을 목에 걸려면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세계랭킹 1, 2위인 아유미, 아미 등 강자들을 넘어서야 한다. 그런 면에서 201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하계올림픽에서 동메달, 2019년 레드불 BC ONE E-Battle 우승 등 큰 무대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온 건 강점으로 꼽힌다.
"저는 넓은 공간에서 춤을 추는 걸 좋아해요. 앞으로 아시안게임이나 다른 국제대회 나가게 될텐데 이런 대회가 훨씬 더 재밌어요. 그래서 국제대회를 많이 선호해왔고, 큰 무대일수록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작은 무대가 더 떨리는 스타일이에요."
김예리는 예전엔 매일 보통 5~6시간씩 연습을 해왔는데, 각종 활동으로 바쁜 요즘도 3시간정도는 훈련을 한다고 했다. 실전에서 아껴온 '필살기'를 반복훈련하고 실수 없이 하도록 연마해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다가서기 위해서다.
"매번 연습 영상을 (SNS에) 올려도 절대로 실제 대회에서 안 쓰는 기술들이 있었는데, '스와입스 나인틴'이라고, 한 다리로 차서 올려서 물구나무를 서서 도는 동작인데요. 제가 그걸 한참 전부터 연습을 했어요. 그런데 성공 확률이 낮아서 한번도 대회에서 안 썼거든요. 그런데 이걸 한번 써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김예리가 지금이야 고난도 기술을 자유자재로 하지만, 브레이킹을 처음 시작한 중학생 때는 물구나무 서는 것도 어림없었다. 그렇게 매일 밤 팔굽혀펴기를 시작하자 근육도 몸도 꿈틀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구나무를 서서 한손을 떼고하는 멈춰서 하는 프리즈(Freeze, 멈춤) 동작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에요. 저는 그때 물구나무도 못 섰으니까 '해보고 싶다'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프리즈가) 기본이 됐죠. '우와, 내가 물구나무를 버티다니'부터 해서 동작을 하나하나 할 때마다 성취감이 크게 느껴졌죠."
성취감이란 작은 공을 굴리자 자신감은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외모도 변해갔다. 머리카락도 짧게 자르고 안경도 벗고. 외모는 곧 자신감의 표현이다.
"제가 기술 하나를 성공을 하면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은 거에요. 대단해질 것 같고. 브레이킹을 하면서 입지도 많이 달라지고, 춤을 추면서 환경도 많이 바뀌고, 외모도 많이 바뀌고, 정말 다 바뀌었거든요. (브레이킹은 내게) 터닝 포인트가 딱 맞는 얘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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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리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면서 더욱 놀란 건 '청력장애 4급'이라는 사실이었다. 10세부터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다. 조금 안 들리는 정도가 아니어서 MC가 목청 높여 외치는 가운데,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야 하는 종목에서는 엄청난 핸디캡을 안고 있다.
어떤 음악, 어떤 박자인지도 모르는데, 브레이킹을 해야 한다니. 그럼 해법은? 당연히 연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공간에 떠도는 리듬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일지도, 오감으로 브레이킹을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디제이(DJ)가 마음대로 선곡을 하기 때문에 제가 노래가 안들리면 제가 당황을 해요. 배틀할 때 긴장하는 이유 중 하나가 노래 안들릴까봐 이기도 하고, 그래서 음악이 나왔을 때 최대한 거기에만 신경을 써요. 볼륨의 문제가 아니라 제 귀에 들어오는 소리 자체가 구분이 안되는 거에요, 음악이. 그래서 그럴 때는 최소한만 캐치를 하는 거 에요. 박자만 캐치를 한다든지."
그러면서 자신만의 비법을 터득했다고 말했다.
"음악이 들리는 걸 떠나서 제가 제 마음대로 해석을 하는 거 에요. '이런 노래겠구나' 제 마음대로 해석을 해서 춤을 추는데, 웃긴 게 그게 다 맞아 들어가요. 신기하게 귀가 잘 안들리는 대신에 '이런 행운을 주시는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그렇게 도움 아닌 도움을 받으면서 극복을 하고 있는거 같아요."
브레이킹을 전혀 모르는 '브알못'이 김예리 공연을 몇번 돌려보고는 '다른 선수에 비교해보면, 음악과 하나가 되는 연기를 펼치고 동작도 정말 시원시원하다'고 했더니,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한발 나아가 '그래도 다른 선수보다 길쭉한 신체를 갖고 있는 것 아닌가'란 질문을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디.
"저도 제가 정말 타고 났으면 지금보다 더 잘했어야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제가 몸이 타고났으면 지금 보다 잘했을 거에요."
팔로워가 국내외 합쳐 31만에 이르는 김예리의 인스타그램 프로필 소개란에는 Limitless(리미트리스), 즉 한계가 없다고 적어놓았다. 브레이킹에 여성은 안된다는 편견, 브레이킹 장르 다양성에 대한 편견, 장애를 가져 안된다는 편견, 그 모든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다양한 춤을 추고 싶어하는데,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한 우물만 파라' 이런 분들도 많거든요. 저는 다 잘하고 싶으니까 도전한 거라서 모든 분야에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거를 '리미트리스'라는 단어로 전달을 하고 싶었던 거 에요. '한계가 없다', '장르에 한계가 없다', '내가 비걸로만 활동 하는게 아니다', '나는 다 하고 싶다'라는 포부를 한 단어로 올린 거에요."
브레이킹 선수들은 경기에 앞서 소개될 때 별명과 이름을 합쳐서 불린다. 김예리의 별명은 옐인데, "옐! 김예리!"라고 소개된다. 그래서 '왜 옐이라고 지었느냐'고 물으니, 김예리는 "별다른 의미는 없고, 이름이 예리니까 친구나 선생님이 줄여서 옐!이라고 불러서 간단하게 친근하게 부르는 닉네임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리는 옐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YELL이라고 쓴다. 소리지르다, 외치다란 의미다. 김예리는 별뜻 없이 지었다고는 하지만 김예리가 써온 스토리엔
편견과 한계를 깨뜨려온(Breaking) 김예리, 세상을 향해 소리질러(Yell)!
항저우아시안게임을 넘어 한국 비걸(B-girl)로서 큰 획을 긋길 기대한다.
국영호 기자 [iam905@mbn.co.kr]
스포츠야 PD : 황현욱·이만행
<1월13일 방송된 'MBN 스포츠야'와 과거 기사들을 참고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