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거목’ 이건희 별세 한 달… 되돌아본 그의 스포츠계 ‘행적’
한국레슬링에 300억원 투자…세계정상 수준 견인
프로 아마 가리지 않고 팀 창단하거나 경기단체 맡아
1982년 대한레슬링협회장직 수락은 전경환 권유에‘자의반 타의반’
1996년 IOC위원 피선은 삼성이 육상연맹 맡는 조건으로 김운용이 추진
[MK스포츠] 한 달 전인 지난 10월 25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건희 회장이 ‘재계의 거목’으로 불리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그룹 임원들에게 신경영 개념을 설파하며 삼성 브랜드를 세계 톱 레벨까지 끌어 올린 그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사망한 이 회장을 ‘정경유착’ ‘무노조 경영’ ‘조세포탈’ 등의 당사자로 지목하며 부정적 측면을 부각하게 시키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이 재계에 남긴 ‘빛과 그림자’ 가운데 ‘그림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우리나라 스포츠계에 이바지한 공로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영원히 기록될 만하다.
한마디로 이건희 회장은 스포츠계에 ‘빛’을 남겼지 ‘그림자’는 남기지 않았다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성싶다. 정주영 회장이 1988년 하계올림픽 서울 유치의 주역이었듯이 이건희 회장은 2018년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에 앞장서 그 뜻을 이루었다. 또 21년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높였고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 국내 프로, 아마 스포츠의 실질적인 구단주로서 공헌했다. 레슬링 육상 빙상 배드민턴 탁구 등의 경기단체를 삼성그룹이 맡도록 해 아낌없는 투자를 지휘하기도 했다. 필자는 1980년부터 20년 가까이 동아일보 레슬링 담당 기자로서 이건희 회장의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시절과 IOC 위원 피선 등 그의 스포츠계 ‘행적’을 지켜봤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팩트를 위주로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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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무체육관에서 서울올림픽 메달리스트와 함께한 이건희 회장(뒷줄 한가운데). 이 회장 왼쪽은 서울올림픽에서 우승한 ‘붕대 투혼’ 한명우, 오른쪽은 김영남. 앞줄 오른쪽부터 손갑도 코치, 장창선 전무, 안재원 코치, 최영길 감독, 안천영 감독. 오른쪽 끝은 김정상 협회 부회장, 왼쪽 끝은 김익종 기획이사. 사진=대한레슬링협회 |
고교생 이건희가 레슬링에 입문한 것은 1958년 봄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하면서다. 당시 이 학교 3학년으로 레슬링부에서 활약했던 김필규(79) 전 KPK통상 회장은 2019년 서울사대부고 동문들의 수필 모음집 ‘우리들의 이야기’ 8호에서 이 회장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돌이켰다.
‘서울사대부고 강당 한구석에 있던 레슬링반에서 7, 8명의 신입생 지망자들과 상견례를 했는데 유난히 피부가 희고 눈이 깊고 귀티가 나는 당신(이 회장)을 보고 “왜 하필 레슬링반을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몇 년을 일본에서 살았는데 당시 일본은 물론 세계 프로레슬링의 영웅이었던 역도산의 경기를 많이 보고 존경했기 때문에 레슬링이 하고 싶어졌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고교 2학년까지 약 2년 가까이 하루 두 개의 도시락을 들고 방과후 학교 강당에서 열심히 레슬링의 기량을 갈고닦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레슬링을 하다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아버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운동을 그만두라”는 말을 듣고 학업에만 전념하게 됐다고 한다. 이 회장은 1959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 고등부 경기에 나갔으나 입상은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공 시절 억압적 분위기 속 레슬링회장 맡아
이 회장이 레슬링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2년 3월이었다. 1981년 9월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해 문교부에서 체육국을 떼어내 체육부를 출범시켰고 초대 장관에 ‘2인자’였던 노태우 무임소장관을 임명했다. 당시 대한체육회는 조상호 회장이 맡고 있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실제(實弟)로 청와대 경호실 출신이자 유도 유단자였던 전경환이 체육계 실세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었다.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사무총장이었던 전경환은 걸핏하면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을 등촌동 사무실로 불러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올림픽 메달 유망종목 회장 선임에도 관여했다. 그 결과 탁구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복싱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유도는 박용성 두산그룹 사장이 선임됐고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이었던 이건희 회장도 대한레슬링협회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레슬링협회를 맡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서울대 상대 출신인 김정상 신라호텔 부사장을 협회 부회장으로 겸직 발령하고 전무이사는 1966년 미국 토레도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52kg급 우승자인 장창선을 기용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1984년 LA올림픽 대비체제를 갖추었다. 장창선은 모든 종목을 통틀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선수권자로 2016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의 영예를 안았다, 2년 뒤 한국레슬링은 LA올림픽에서 그레코로만형의 김원기와 자유형의 유인탁이 금메달을 땄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선 김영남과 한명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박장순과 안한봉,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심권호가 각각 우승했다. 이 회장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재임 기간(1982~1997) 동안 올림픽 7개, 세계선수권 4개, 아시안게임 29개 등 모두 40개의 금메달을 따 한국레슬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회장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지급하는 대한체육회 포상금(금 100만 원, 은 50만 원, 동 30만 원)과 동일한 금액을 선수들에게 추가로 지급하는 등 재임 16년간 한국레슬링을 위해 300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슬링 회장 회견 때“문제점 지적해달라” 자신감
이 회장은 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레슬링협회 출입기자단 간사 역할을 했던 필자가 장창선 협회 전무에게 요청해 이뤄지긴 했지만 이 회장은 해마다 연초에 12, 13명의 레슬링 담당 기자들을 신라호텔 간담회장으로 초청했다. 이 회장과의 간담회는 4, 5년 계속됐는데 그는 항상 필기구를 들고 메모를 해가며 “잘한 일은 생략하고 문제점만 지적해달라”며 진지한 자세로 회견에 임했다. 어느 해인가 정확하지 않지만 필자가 “대표선수 부상 예방을 위한 스포츠 테이핑(Taping)시스템이 레슬링 선진국엔 있는데 우리는 없다”고 말하자 이회장은 “좋은 지적이다”며 즉석에서 관계자에게 “뉴욕지사로 연락해 전문가를 빨리 초청하라”고 지시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회장은 장창선 협회 전무와 박성인 삼성탁구단 감독 등을 그룹 이사로 기용하는 등 경기인 출신들의 대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었다.
이상호 세계선수권 우승…“절반은 이 회장 작품” 농담
필자는 1987년 여름 ‘파스칼의 원리’를 개발한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고향이자 세계적인 타이어 미슐랭의 본사가 있는 클레르몽페랑에서 열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를 현지 취재했다. 1년 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던 시점이어서 선수 간 경쟁도 치열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대회 현장을 방문, 며칠 묵으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그때 이 회장은 스위스 론진에 주문해 만든 삼성 홍보용 손목시계를 가져와 국제레슬링연맹(FILA) 밀란 엘세간 회장(유고)을 비롯, FILA 임원, 심판에게 선물했는데 공교롭게도 자유형 48kg급 이상호가 우승하자 “금메달 절반은 이회장이 땄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이회장은 서울올림픽 기간중에도 신라호텔이 숙소인 엘세간 회장 부부를 한남동 자택으로 초청, 극진하게 대우했고 엘세간 회장 부인에겐 아름다운 한복을 선물하는 등 FILA 임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왔다.
김운용 회장, 군출신 박정기 육상연맹회장을 ‘워커’로 지칭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3개월 앞둔 4월쯤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장이었던 필자는 김운용 대한체육회장 겸 IOC 부위원장과 소공동 롯데호텔 일식집에서 배석자 없이 단둘이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를 위해서는 육상종목이 활성화돼야 하는데 ‘워커’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푸념했다. 김 회장은 1973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해 중동에 나가 있다가 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전력 사장(1983~1987)과 대한육상연맹 회장(1985~1996)을 겸임했던 박정기 회장(육사 13기)을 ‘워커’(군화)라고 지칭했다. 박정기는 육사 11기인 전두환의 대구공고 후배로 육사 생도시절 룸메이트였다. 김회장은 박회장이 한전사장이 당연직으로 맡게돼있는 육상연맹 회장직을 한전 퇴임 이후에도 고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다. 박회장이 10년 넘게 육상연맹 회장 자리를 지키는 상황에서 한봉수, 안병화 등 후임 사장의 육상연맹에 대한 재정지원 등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회장은 박회장이 대한체육회장직에도 도전, 그에 대한 심기가 불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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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공 더반 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가 확정되는 순간 감격하는 이건희 회장(가운데). 오른쪽은 사위이자 당시 대한빙상연맹 회장인 김재열 제일모직 사장, 왼쪽은 정병국 당시 문체부 장관. 사진=삼성그룹 홍보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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